[시평]명분없는 추경은 안 된다
5공 전두환 정권도 적어도 경제 운용에서는 눈길가는 업적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통화 재정의 긴축과 3%대 물가 안정이 바로 그것이다.
정통성 시비에 시달린 전두환 정권은 그 보상심리 때문인지 경제 운용에서 뚜렷한 정책 일관성을 보였다. 그 결과 연 30%선을 넘나들던 인플레를 잠재우고 흑자재정의 기반을 구축, 86-88년 호황을 만끽할 기초를 다졌다는 평가다. 인기없는 긴축을 고수한 결과 체질이 개선된 경제를 넘겨줄 수 있었다.
반면 김영삼 정권은 팽창정책에 탐닉하다 IMF 구제금융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다. 당시 박재윤 경제수석은 개혁을 위한 진통제라는 명분을 앞세워 때늦은 경기부양책을 강행했고, 국제수지 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져 외환위기를 불렀다.
참여정부가 이어받은 우리 경제의 실상은 어떠한가. 김대중 정권은 국민들의 피와 눈물과 땀 덕분에 일단 공황상태를 벗어나 회복국면에 진입한 경제를 남겼다. 엄청난 규모의 국가채무도 함께 남겼다. 그동안 진행된 수많은 구조조정 작업은 민간 채무를 국가 채무로 바꾼 것에 다름 아니다.
정부가 공적자금을 퍼부어 문닫을 기업은 닫고 썩은 부분은 도려내 회생시키는 것이 구조조정이었다. 공적자금은 바로 국가의 빚이다. 앞으로 후손과 차기정권이 두고두고 갚아야 할 국가채무가 남아있는 한 우리는 경제 회복을 기뻐할 처지가 못 된다.
최근 추경 편성의 타당성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김진표 경제부총리가 런던에서 제기한 추경편성 방침에 대해 정계 학계가 벌집 쑤신 듯하다. 대통령 방미와 추경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나, 김 부총리는 방미를 전후해 규모와 시기를 정하겠다며 추경 편성을 강행할 태세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이번 추경과 그에 따른 적자재정 감수의 명분은 무엇인가. 침체된 경기를 살리기 위한 것이라면 결론은 이미 명확하다. 경기 판단에 신중한 한국은행의 박승총재가 국회에서 "2분기가 경기 저점이며 하반기엔 회복될 것"이라는 매우 이례적인 발언까지 했다.
연초이후 경기하강의 원인이 이라크 전쟁, 북핵 파문, 사스 파동 등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외생적 변수 때문임은 대부분 공감한다. 그런데 외생변수들이 하나씩 가닥을 잡아가는 데, 왜 뒤늦게 내수 진작을 들고 나서는 지 납득이 안 간다.
김 부총리는 재정운용에서 강경보수로 이름높은 세제전문가 출신이다. 국가채무 현황을 모를 리 없는 그가 갑자기 적자재정 감내까지 들먹이며 추경을 강행할 테세이니 더 고개가 갸웃거린다. 버겁지 않아 발탁됐다 해서 소신을 바꿀 분은 아닐 텐데….
새 정권이 맨먼저 해야 할 일은 아직 국민 지지가 남아있을 때 남은 임기를 다지기 위한 고통분배라는 이름의 투자다. 이는 세계 어느 나라의 개혁론자도 공감하는 수순이다. 힘이 있을 때 개혁하고 성과가 손에 잡히면 더 큰 추진력을 얻게 됨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출범후 2달동안 정부가 어떤 개혁 비전과 고통 분배를 제시했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주5일 근무 확대 요구, 3급이상 공직자 급여인상 방침에 이어 이번엔 적자재정론까지 펴고 있다. 인기영합이냐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먼저 나라 빚을 줄일 로드맵(단계적 청사진)부터 제시하라. 지난해말 133조원에 달한 국가채무를 어떻게 줄일 지 실행계획을 만들어야 한다. 적자재정은 안 된다. 지금 우리 형편에 명분없는 추경이나 경기부양은 더욱 안 된다.
DJ정부는 나라 빚을 늘려도 그 불가피함을 용서받았다. 그러나 참여정부에겐 변명의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