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노대통령의 "코드 맞추기"
노무현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간) 미국 땅을 처음으로 밟았다. 첫 방문편으로 대통령 전용기를 기다린 '보람'에도 재미동포 700여명이 참석한 첫 행사에서 불안을 먼저 꺼내야 할 만큼 분위기는 편안하지 못하다. 격도 '국빈방문'(state visit)에 준하는 예우를 받는다고 하지만 '실무방문'(working visit)이다. 북핵 위기와 미국의 강경한 입장이 빚어 낸 결과다.
노 대통령은 도착 3시간도 안돼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린 동포간담회에서 '반드시' '확실하게' '간곡히' 등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얘기했다. 북핵은 반드시 폐기돼야 하고, 평화적인 원칙에서 해결한다는 원칙을 확실하게 확인하며, 주한 미 2사단의 재배치 문제는 유보하도록 간곡히 요청하겠다는 요지였다.
노 대통령은 정의와 인권이 승리해 온 미국의 역사를 부럽고 소중하게 생각해 왔고, 자신에 대한 의혹과 불신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라크 파병을 신속하고 단호하게 결정했다고 말했다. 북핵 외의 현안에 대해서는 상황에 따라 얘기할 만한 것만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을 의식한, 그리고 실용적인 노대통령의 발언은 조지 W 부시 대통령과의 '코드 맞추기'로 해석되고 있다. '북핵의 반드시 폐기' 등은 미국의 입장을 존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방미의 최대 이벤트인 정상회담(14일)의 정지작업을 위해 워싱턴을 방문했던 여야 정치인, 정부 고위관리, 경제인들은 한결같이 "미국이 달라졌다. 예상보다 강경하다"고 귀뜸했다.
더구나 북핵 위기의 경제적 파장도 한국물 급락 등으로 적지 않았다. "북핵 불안은 세계 투자자도 갖고 있어 이를 해결하는 게 한반도 안전은 물론 경제 발전에도 꼭 필요하다"는 노 대통령의 언급도 현실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날 행사에 기대반 우려반으로 참석했던 동포들도 "불안을 말끔하게 해소하고 돌아가겠다"는 노대통령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문제는 미국이 키를 쥐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이라크전에 반대한 칠레를 뒷전으로 밀고 지난 주 싱가포르와 성대하게 자유무역협정 서명식을 가졌다. 칠레는 지난해 12월 협상을 끝내 이라크전후 첫 서명국가가 될 것으로 예상됐었다. '적이냐 동지냐'의 미국식 양분법을 극명하게 보여 준 사례다. 노 대통령은 동지는 예우하고 적은 벌 주는 미국의 한 가운데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