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실망스러운 국민연금의 의결권행사기준
지난 2월 24일 국민연금관리공단 기금운용본부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기준을 발표했다. 2004년말 개정된 기금관리기본법에 따른 조치였다. 기금관리기본법은 연기금의 의결권행사를 허용하는 대신 의결권행사기준을 사전에 만들고 이에 의거해서 투명하게 의결권을 행사토록 했기 때문이다.
기업의 경영진과 지배주주를 가장 직접적으로 견제하는 것은 사외이사들이지만 이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기관투자자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최대 기관투자자로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지침 채택은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발표된 행사기준을 읽으면서 필자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설명의 편의를 위해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캐나다 국민연금 (Canada Pension Plan)의 의결권 행사기준과 비교하고자 한다. 캐나다 국민연금은 우리나라 국민연금과 마찬가지로 전 국민들로부터 기여금을 강제 징수하는 연금으로서 2004년말 기준으로 60조원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다. 전체기금의 45%를 주식에 투자하고 있어 캐내다 기업들에 대해서는 평균적으로 2~3%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먼저,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지침은 캐나다 국민연금의 지침에 비해 분량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짧다. 캐나다 국민연금의 지침은 27페이지인 반면 우리 국민연금의 지침은 고작 1페이지에 불과하다. 분량이 바로 질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량이 짧다보니 국민연금의 지침은 충분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국민연금의 지침은 정관변경의 건과 관련하여 ‘기업가치의 훼손, 주주 권익의 침해 등을 초래하지 않는 한 찬성의 의사표시를 한다’라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정관변경의 건이 기업 가치를 훼손하고 주주권익을 침해하는지 전혀 언급이 없다.
결국 훼손 또는 침해 여부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펀드매니저들이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있고 그 범위 내에서는 외부의 부당한 압력도 용인하겠다는 것으로 비춰질 우려가 있다. 이렇게 모호한 지침은 기업입장에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어떻게 행사할 것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캐나다 국민연금의 경우 의결권 행사지침을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정관변경의 건과 관련해서는 사외이사 비중, 집중투표제, 시차임기제, 최고경영자와 이사회 의장 분리, 독소조항을 비롯한 각종 경영권방어수단 등 주요 안건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사보수 승인의 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국민연금의 의결권행사지침을 보면 사외이사에게 스톡옵션을 부여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집행이사에게 스톡옵션과 주식 중 어느 것을 부여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개별임원의 현금보수는 공개되어야 하는지 등에 관해 전혀 언급이 없는 반면 캐나다 국민연금은 이들 사안에 관한 입장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번에 발표된 의결권행사지침은 그 기준의 모호성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의결권을 행사하는 조직과 절차에 관해서도 전혀 언급이 없다. 기금운용본부 내 어느 조직에서 의결권을 행사하는지, 중요사안의 경우 누가 최종 판단을 하는지, 의결권행사지침 자체는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것인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국민연금이 해외주식도 상당한 규모로 보유하게 될 텐데 의결권행사지침에 이를 고려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의결권 행사내역을 공개함에 있어서도 캐나다 국민연금의 경우 행사즉시 공개하는 것과는 달리 국민연금은 다음분기 초월에 공개토록 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의결권행사지침을 대폭 보완함으로써 의결권행사를 통한 자산가치의 보전과 의결권행사의 투명성 확보라는 당초의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