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월요일 이른 아침 수출입은행 여의도 본점 정ㆍ후문에는 `낙하산 No'라고 쓰인 붉은 깃발을 든 은행 직원들이 200여명 모여 있었습니다.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결연한 표정으로 모여든 이들은 출근하는 동료들과 눈인사만 나눌 뿐 별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신임 행장의 첫출근을 막기 위한 집회였기 때문입니다. 집회를 시작되며 분위기가 고조되고 간혹 고함소리도 들렸습니다. 당초 내부승진자를 새 행장을 맞이하고 싶어했던 직원들의 좌절과 불만이 이렇게 터져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오전 10시 양천식 신임 은행장이 탄 차가 은행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양 행장은 길가 도로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그를 한발짝도 은행에 들일 수 없다며 노조측이 주차장 입구까지 막아섰기 때문입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노조 대표와 몇 마디 나누던 양 행장은 3분 뒤 다시 차에 타야했습니다. 노조가 "조직의 자존심 때문에 외부인사를 행장으로 맞을 수 없다"며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오후 2시 양 행장은 다시 은행을 찾았으나 허사였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갈등 속에서도 험한 말이나 고성은 없었습니다. 양 행장이 임시사무실로 마련된 한 호텔로 돌아간 뒤 주변에서는 "내일이면 양 행장이 은행에 들어오겠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전임 행장 역시 불과 반나절간 출근을 저지당한 이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상대로 다음날 오후 양 행장은 제14대 행장으로 공식 취임했습니다.
일각에서는 노조의 투쟁이 언제까지 치달을 듯한 기세를 보였다가 `싱겁게' 끝난 것을 놓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전에 노사간 이면합의가 있었던 게 아니냐, 하루 만에 투쟁을 끝낸 것은 "신도 부러워한다는 직장에서 웬 투쟁이냐"는 주변의 질시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란 말도 나왔습니다.
알아보니 양 행장이 먼저 몸을 낮추면서 실마리를 만들었더군요. 양 행장은 취임 전 10일 일요일 밤 노조 위원장의 집 앞까지 직접 찾아갔다고 합니다. 노조측은 CEO가 직접 찾아와 본인의 비전과 의지를 밝히는 등 대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사태의 해결을 시도하려는 모습에 대해 이례적으로 `용기와 결단'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김진호 전무 등 임원 전원 및 부서장들도 12일 오전 노조사무실을 방문, 이들을 설득했습니다. 노조측도 자신들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하는 선배들의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양 행장은 조직이 아파하는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자존심'을 접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3년간 그가 이끌 수출입은행이 국제무대에서 수출대국 한국의 `자존심' 역시 살려주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