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기업집단들의 그룹경영 체제는 대부분 법제도적으로 무책임, 무권리 상태에 있다.
물론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된 기업집단들, 즉 LG와 농심 등의 경우에는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주회사 역시 주식회사이므로 이사회 구성과 공시 등 상법과 증권거래법상의 의무를 이행하여야 하며 동시에 주식회사로서의 다양한 법적 권리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주회사가 아닌 모든 그룹경영 체제는 그것이 상법상 아무런 법률적 실체가 아닌 까닭에 아무런 법적 의무도 권리도 없다. 가령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은 구조조정본부 혹은 전략기획실 체제를 통해 그룹에 대한 지배(control)와 경영(management)을 수행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상법과 증권거래법, 공정거래법 어디에도 구조조정본부 혹은 전략기획실의 실체는 인정되지 않으며 따라서 이들 조직은 아무런 법적 권리도 책임도 없다.
이들 조직은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시의무도 없으며 이사회 및 감사를 구성할 법적 의무도 없으니 투명성이 전혀 없다. 또한 삼성자동차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구조본 혹은 전략기획실 같은 그룹경영 조직의 지휘에 의해 발생한 것이 명백한 계열사 부실화에 대해서도 법적으로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재벌총수의 무책임’ 경영이라는 시민사회의 비판은 바로 이와 같은 법률적 공백상태에서 연유하고 있다.
기업집단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기업집단의 존재가 합리성을 갖는 한, 기업집단 전체를 지휘, 통제하는 그룹경영 체제와 조직은 불가피하다. 이는 그룹경영 최상층에 총수가족이 있건 없건 관계없다. 한전, KT, 포스코 역시 대기업집단이지만 총수가족이 없다.
구조본 혹은 전략기획실과 같은 그룹통합 경영조직은 기업집단의 경영논리상 명백하게 필요하며 그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도 그 조직이 법률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현행 법체계의 결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기업집단의 현실에 맞는 방향으로의 상법,회사법 및 증권거래법, 공정거래법을 고칠 필요가 있다. 법률적 공백상태를 타개함으로써 기업집단 경영조직의 법률적 책임과 권리를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기업집단이 널리 발전한 유럽대륙의 경우 회사법과 형법으로 기업집단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독일의 콘쩨른법은 회사법의 일부인데, 기업집단의 계열사에 대한 지배 및 지휘의 권리를 폭넓게 인정한다. 부실 계열사에 대한 우량계열사의 지원 등 기업집단의 그룹경영을 법적 권리로서 인정하고 있으며 또한 이를 위한 비시장적 내부거래를 우리나라처럼 불공정거래로 비판하지도 않는다.
동시에 콘쩨른법은 기업집단의 그룹경영 특히 내부거래로 인해 발생한 계열사의 피해와 부채에 대한 법적 책임을 엄격하게 묻고 있다. 소액주주 및 채권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콘쩨른법은 포르투갈과 브라질이 도입했으며, 또한 국영 대기업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광범위하게 대기업집단들이 창출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슬로베니아 등 동유럽 체제전환국들이 도입하였다.
또한 프랑스와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 등 라틴법계 나라들은 상법 및 형법상의 로젠블룸(Rozenblum) 판례법을 통해 기업집단의 법적 책임과 법적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기업집단의 존재가 확고하며 안정적임을 전제로 로젠블룸 판례법은 기업집단에서의 그룹경영 체제, 즉 계열사 지원과 내부거래를 법적 권리로 인정하고 있다. 물론 콘쩨른법과 로젠블룸 판례법은 내부거래와 계열사 지원 등 그룹경영 체제에서 간혹 발생하는 특정 대주주의 사적 이익 취득 행위를 형법으로 엄격하게 처벌한다.
우리나라도 콘쩨른법 혹은 로젠블룸 판례법의 도입을 통해 기업집단의 법률적 공백상태를 적극적으로 타개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총수가족 등 특정 대주주의 존재와는 무관하게 기업집단의 법률적 지위가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재벌총수 등 특정 대주주가 기업집단의 그룹경영을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오용하는 행위는 형법상 최고형으로서 다스려야 한다.(국민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