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의 불길이 치솟던 이집트 사태에서 87년 6월 서울이 떠올랐다. 독재타도를 외치는 성난 민심에 절대 권력이 무너진 역사의 순간들이다.
18일간 진행된 이집트 사태는 우리 정치발전사에서 가장 극적 순간인 80년~90년 상황을 압축된 고속촬영 영상처럼 펼쳐 보였다. 서로의 시작점은 달랐으나 진행과정과 결말은 같다. 군 정보국장을 지낸 인사가 후계자에 오르고 퇴진불사(한국은 호헌)- 시위 확대- 권좌에서 물러나는 수순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졌다. 퇴진한 권력자가 쫓기듯 은둔지로 향한 것조차 닮았다. 등장인물과 시공에 차가 있을 뿐 콘티만 놓고 본다면 영락없는 시퀄이다. 역사는 그렇게 반복되는가 보다.
서로의 연관성은 더 거스러 오른다. 한국 군사정권의 출발점인 5.16이 1952년 이집트 군사 쿠데타의 영향을 받은 점이다. 당시 가말 나세르가 주도하는 '자유장교'단이 나약하고 부패한 왕정을 쓰러트리고 근대화된 오늘의 이집트를 새로 세웠다.
2대 대통령에 오른 나세르가 국가 재건과 통합을 위해 내세운 기치가 범아랍주의이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통해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 2차 세계 대전을 치르며 눈 뜬 민족주의 가치에 종전이후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영국 등 서구열강이 보여준 배신, 또 이들의 석유자원 침탈에 대한 반감이 교차하며 아랍권은 결속했다.
자유장교단과 한 뿌리인 바트(아랍사회주의 부흥)당 청년장교들이 시리아, 이라크 전제주의를 무너뜨리고 통합의 기운은 무르 익었다. 예멘에서도 청년장교들이 봉기했다.
그 결실이 통일아랍공화국의 태동이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우선 국가통합을 단행했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이어 이라크와 시리아가 결합했으나 이해관계가 뒤틀리며 또 헤어졌다. 그 흔적은 이제 그들 국기에만 남았다. 모두 적백흑 삼색기 바탕에 예멘은 별이 하나, 시리아는 둘, 이라크는 셋, 그리고 이집트는 독수리 문양이 새겨져 '못 다한 통합의 꿈'을 보여준다.
하지만 국제정치무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비동맹- 제 3세계권으로 한 목소리를 내던 이들은 이후 전개된 국제질서변화에 따라 각 자의 길로 들어선다. 아랍 통합의 중심이던 시리아는 친 소련노선을 걷다 쇠락하고, 친서방으로 돌아선 이집트와 이라크는 아랍의 맹주를 다투다 사담 후세인 대통령의 과욕으로 그와 함께 바트당의 운명도 다했다.
이에따라 나세르와 그의 혁명동지였던 안와르 사다트를 이은 호스니 무바라크의 퇴진은 60년간 계속된 이집트 군사정권의 종식인 동시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랍 사회주의 통합의 마지막 불길이 사그라 들었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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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많은 중동전문가들은 범아랍주의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힘으로 권력을 쥔 자들이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내세운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는 평가들이다. 실제 아랍 군사정권들은 지독한 변절을 시작했다. 그들이 북한을 따라 했다는 사실에서 또 하나의 아이러니를 맞는다.
89년 5월 이라크. 후세인이 주관하는 아랍연맹회의 취재차 찾은 바그다드는 거리 곳곳에 세워진 사담 선전물과 입간판, 기념 조형물이 우선 눈에 들어왔다. 유창한 한국어로 외신 손님을 맞는 통역관의 어투에서 실마리가 나왔다. 짙는 평양 사투리 발음의 그는 어디서 한국어를 배웠느냐는 질문에 ‘만경대학원’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비동맹으로 유대를 강화했던 북한이 아랍국에 수출한 것은 혁명이념, 무기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주특기였던 개인 우상화 작업도 한 아이템이었다. 순간 아랍 부흥의 신념에 찼던 아랍국 지도자들의 신성한 이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저 정권욕에 찬 독재자의 형상만 남았을 것이다.
이후 후세인이 개인우상화를 통해 장기집권의 길을 걷다 철퇴를 맞았고 시리아는 아사드가 아들에게 정권을 대물림했다. 이번에는 무바라크가 자신의 차남인 가말에게 권력을 승계하려다 분노한 민심에 몰락하고 말았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사실에 떨고 있을 북쪽이 안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