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속 5분씩 늦는 시계가 될지, 아니면 아예 고장났지만 한번은 시간을 제대로 맞추는 시계가 될지 고민입니다." 최근 만난 한 자산운용사 직원의 말이다.
펀드시장에서 자금이 지속적으로 유출되면서 자산운용사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한 발 늦더라도 트렌드를 쫓아가는 '추종자'가 될지, 시류와 관계없이 내 투자 스타일을 고집해 고장난 시계가 되더라도 어느 순간 '대박 상품'으로 각광받는 시기를 기다릴지 말이다.
올해의 승자는 '고장난 시계'들이었다. 가치투자를 고수해온 신영자산운용,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에셋플러스자산운용은 전체 펀드시장이 위축되는 중에도 시중 자금을 끌어모으고 있다.
펀드평가사인 제로인에 따르면 지난 13일 기준으로 국내 주식형 펀드(ETF 제외)에서는 올들어 5조8477억원이 순유출됐다. 이 추세대로라면 지난해 순유출 금액인 7조2961억원을 웃돌 가능성이 있다. 코스피지수가 상승하면서 대형 펀드를 중심으로 수익 실현을 위한 환매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세 운용사의 대표펀드에는 자금이 쏠리고 있다. 올들어 신영밸류고배당 펀드는 5259억원, 에셋플러스코리아리치투게더 펀드는 3899억원, 한국밸류10년투자 펀드는 2985억원의 자금을 끌어모았다.
지금은 잘 나가는 펀드들이지만 어려웠던 때도 있었다. 2011년에 '차화정(자동차, 화학, 정유)' 등 일부 대형주만 강세를 보이자 가치주 펀드의 수익률은 상대적으로 부진했다. 허남권 신영자산운용 부사장은 가치주 대표 펀드인 신영마라톤 펀드 고객들에게 수익률 부진을 반성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투자 신념까지 꺾지는 않았다. 허 부사장은 시장의 극단적인 쏠림이 완화되면서 저평가 기업들의 왜곡된 주가도 제자리를 찾아갈 것으로 믿었다. 이후 실제로 시장 자금은 성장주에서 가치주로 이동했다. 현재 신영마라톤은 설정액이 9000억원을 웃도는 대형 펀드로 1년 수익률이 14.97%, 2년 수익률이 33.98%, 3년 수익률이 40.04%에 달한다. 올곧은 투자 철학이 수익률로 이어지자 투자자들은 자산운용사를 믿고 돈을 맡기고 있다.
대형 운용사들은 이들의 성공을 부러워하면서도 '종합 백화점'식의 펀드 운용을 멈출 수 없다고 말한다. 한 대형운용사의 임원은 "투자자들의 다양한 니즈(요구)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한 종류의 펀드에만 집중하는 전략을 택하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모든 펀드에서 뛰어난 팔방미인이 되는 것도 어렵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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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대형 운용사들은 사정이 낫다. 투자자들이 대형 운용사의 브랜드를 신뢰하고 투자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괴로운 곳은 자신만의 색깔도 없고 규모도 크지 않은 중소형 자산운용사다. 시장의 트렌드를 이끌 능력도 없고 수년간 투자 철학을 관철시킬만한 깡도 부족하다.
펀드에 투자했다 돈을 잃어 본 투자자들은 더 이상 아무 펀드에나 돈을 넣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브랜드 파워나 자기만의 색깔이 없는 자산운용사는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5분 늦은 시계가 될 지, 한번이라도 시간을 제대로 맞추는 고장난 시계가 될지 이제는 결정해야 할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