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말 신용평가사의 정유사 신용등급 강등 발표가 나온 날 우연히 석유화학 부문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애널리스트를 만났다. 화제가 자연스럽게 신용등급 강등으로 흘렀다. 그는 단박에 "시점이 아쉽다"고 했다. 자칫 3개월짜리 등급이 될 수 있다는 것. 정유사의 사업구조상 가능한 시나리오라는 지적이었다.
사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국내 정유사가 내수기업이 아니라 수출기업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정유사가 수출기업의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산유국에서 원유를 사다가 경유나 휘발유 등으로 정제해 일부는 국내에서 소비하지만 대부분은 수출하는 사업구조 때문이다.
최근 정유사 신용등급 강등의 주요 원인이 된 실적 부진도 이런 사업구조 탓이 컸다. 유가가 100달러대일 때 원유를 사왔는데 정제해 판매할 시점이 되자 가격이 급락해 마진이 낮아지고 재고자산에서 대규모 손실이 발생하게 됐다는 얘기다. 2011년 10월 배럴당 10.29달러에 달하던 정제마진은 지난해 4분기 6.23달러까지 떨어졌다.
신평사의 이번 정유사 등급 강등 배경은 실적이 악화되고 재무상태가 불량해지는 상황에서 더 이상 등급 조정을 늦추긴 어렵다는 것이었다. S-Oil은 원유정제시설 상업가동 첫해인 1980년 이후 34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해 영업적자를 냈다. 연간 영업손실 2600억원 중 4분기에만 2100억원대 적자를 냈다. GS칼텍스도 지난해 4500억원 규모의 적자를 기록했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등급이 강등된 시점이 공교롭게도 유가와 실적이 바닥을 치고 개선 전망을 보이는 시기와 겹쳤다는 점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유가가 오르고 정제 마진이 개선되면 재고자산 손실의 경우 상당 부분 빠른 시일 안에 원상복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시장 곳곳에서 정유사의 실적 개선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하나대투증권은 올해 유가가 안정세를 보이면서 정유부문 적자가 감소하면서 정유사가 흑자전환에 성공할 것이라는 전망을 냈다.
신평사의 신용등급 평가는 기업의 자금줄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잣대다. 신용등급을 두고 민감한 반응이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구설수가 불거지는 상황은 신평업계에도, 기업에도 득이 될 게 없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고치겠습니다"라는 말이 떠오르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