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리포트] 돈맥경화, 기업들 곡소리 난다⑤"좋은 유증을 빠르게"…선진국은 조달 길 넓게 열어둬

자금에 목마른 기업들은 최근 깐깐해진 금융당국의 유상증자 심사로 자금조달 통로까지 막히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한다. 시장에선 과거 대규모 희석과 자금용도 변경 등 주주가치 훼손 논란을 빚은 유상증자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고 있지만, 자칫 '유상증자=주주가치 훼손'이라는 인식이 굳어질 경우 정상적인 성장자금 조달까지 위축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들은 주주 지분의 희석이나 단기적인 주가 하락 가능성만으로 유상증자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조달 자금이 시설투자, 연구개발, 공급망 구축, 신사업, 인수합병(M&A) 등에 투입돼 기업가치를 높이면 장기적으로 기존 주주들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금융감독원의 유상증자 관련 증권신고서 정정 요구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와 그 판단 근거가 외부에 충분히 공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금감원은 정정요구 과정에서 해당 기업에 보완 사유를 전달하지만, 투자자들에겐 어떤 문구나 위험요인, 자금사용 계획이 문제였는지 별도로 상세히 공개하지 않는다. 시장에서는 증자를 추진하는 기업이나 투자자가 당국의 판단 기준을 사전에 예측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상증자 심사에 대한 기업의 부담이 높아지면 기업들의 정상적인 성장투자 목적 자금조달까지 지연되거나 위축될 수도 있다. 실제로 정정요구가 이어지면서 증자 일정이 지연되거나 규모를 축소·철회하는 기업들도 나타났다. 시장에서는 이 같은 지연이 장기화될 경우 투자 적기를 놓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기업들은 자금 사용 목적과 투자계획, 위험요인 등을 충분히 공시하되 사업의 성공 가능성이나 증자 필요성 자체는 시장과 투자자가 판단할 수 있도록 심사 기준을 보다 명확히 해달라고 요구한다.
재계 관계자는 "주주 보호와 기업 자금조달을 대립시키기보다 부실한 유상증자는 엄격히 걸러내고, 성장투자를 위한 유상증자는 신속히 진행할 수 있도록 심사 기준 및 정정요구 사유의 투명성·예측가능성을 높여야 한다"며 "나쁜 유증은 엄격하게 심사해야 하겠지만 좋은 유증은 빠르게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도입한 상법 개정과 소액주주 보호 강화 흐름 속에서 금융당국은 기업이 투자자들에게 자금조달 목적과 용도, 위험요인 등을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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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감원 관계자는 "지금 왜 유상증자를 해야 하는지, 조달한 자금은 어디에 쓸 것인지, 투자위험은 무엇인지 등 투자자가 투자 판단을 하는 데 충분한 정보가 제공됐는지 살펴보려는 것"이라며 "어떤 기업은 유상증자를 해도 좋고 어떤 기업은 안된다고 당국이 결정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라고 말했다. 투자자들에 정정 사유를 공개하지 않는 것에 대해선 "감독기관과 피감독기관 간 논의의 결과로서 정정신고서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정정 사유는 공시할 사항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일반 기업들은 물론 자본시장 참여자들은 금융당국 유상증자 심사 강화 논란을 넘어 이참에 기업 자금조달이 보다 원활해질 수 있도록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기업의 성장자금 조달 통로는 넓게 열면서 기존 주주가치 훼손은 명확한 기준으로 막는 미국·일본식 제도 설계가 국내 자본시장에 필요하다는 제언이다.
미국은 ATM(At-the-Market Offering·시장가 수시발행)과 PIPE(Private Investment in Public Equity·상장기업 사모투자) 등 다양한 자금조달 방식을 활용해 기업이 시장 상황과 자금 수요에 따라 조달 시점과 규모, 투자자 등을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다.
ATM은 기업이 사전에 설정한 발행 한도 안에서 시장 상황을 보며 증권사를 통해 당시 시장가격으로 주식을 수시로 매각할 수 있어 대규모 물량을 한꺼번에 발행하는 것보다 시장 충격을 분산하고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만큼 자금을 조달하는 데 유리하다. PIPE는 기업이 기관투자자 등 특정 투자자와 발행 가격과 규모, 조건을 협상해 주식이나 지분연계증권을 사모로 발행한다. 공개모집에 비해 신속하고 유연한 자금조달이 가능하다.
국내에도 PIPE와 유사한 제3자배정 유상증자가 있지만 상법상 정관의 근거와 회사의 경영상 목적 달성을 위한 필요성이 요구돼 미국보다 활용 요건이 제한적이다. 미국식 ATM처럼 시장 상황에 맞춰 주식을 수시로 발행하는 조달 방식도 국내 기업의 일반적 수단은 아니다.
일본은 대규모 제3자배정에 대해 발행가격과 희석률, 지배주주 변경 등 비교적 명확한 기준을 두고 주주보호 절차를 강화한다. 도쿄증권거래소는 제3자배정으로 희석률이 25% 이상이거나 지배주주가 변경되는 경우 독립된 제3자로부터 발행의 필요성과 상당성에 관한 의견을 받거나 주주총회 등을 통해 주주의 의사를 확인하도록 한다. 일본 회사법의 '유리발행' 규제도 특정 투자자에게 특히 유리한 가격으로 신주를 발행하면 주주총회 특별결의와 이사의 설명을 요구한다. 즉, 기업의 자금조달 자체를 일률적으로 제한하기보다 주주가치 훼손 가능성이 일정 수준을 넘는 지점에 명확한 절차를 적용하는 방식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우리도 미국처럼 기업의 자금조달 선택지는 넓히고, 일본처럼 주주가치 훼손 가능성이 커지는 지점에 명확한 정량 기준과 주주 보호 절차를 두는 방식이 필요하다"며 "당국이 개별 증자의 필요성과 적정성을 폭넓게 판단하기보다 시장이 예측할 수 있는 룰을 만들고 그 안에서 기업과 주주가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