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컴이 36년 만에 '한글과컴퓨터'라는 이름을 내려놓는다. 국산 워드프로세서 '아래아한글'로 국내 문서 소프트웨어 시장을 대표해 온 기업이 문서 중심 회사를 넘어 AI 기업으로 정체성을 바꾸겠다는 선언이다.
한컴은 2일 주주총회를 열고 상호를 '한컴(HANCOM)'으로 변경하는 정관 변경 의안을 의결했다. 1989년 창립 이후 사용해 온 '한글과컴퓨터' 사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이번 사명 변경은 단순한 이름 바꾸기가 아니다. 한컴이 기존 문서 소프트웨어 기업에서 AI 솔루션과 AI 에이전트를 아우르는 기업으로 사업 축을 옮기고 있다는 점을 공식화한 조치다.
한컴은 '아래아한글'을 앞세워 한국어 문서 작성 환경의 표준을 만들어 왔다. 글로벌 오피스 소프트웨어가 국내 시장을 파고드는 상황에서도 공공과 교육, 기업 시장을 중심으로 입지를 지켜왔다. 그러나 최근 한컴이 집중하는 영역은 문서 작성 자체보다 문서 데이터 처리, AI 검색, AI 문서 작성, AI 에이전트 운영으로 옮겨가고 있다.
실적에서도 변화는 나타나고 있다. 한컴은 지난 5월 창사 이후 처음으로 AI 관련 매출을 공개했다. 지난해 별도 기준 매출은 1753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이 가운데 AI 패키지 매출은 89억원으로 전체의 5% 수준이었다.
규모보다 주목되는 것은 성장 기여도다. 지난해 한컴의 매출 순증분 162억원 가운데 54.6%가 AI 매출에서 나왔다. 외형 성장의 절반 이상을 AI 사업이 이끈 셈이다.
올해 들어 AI 매출 비중은 더 커졌다. 1분기 별도 기준 매출은 465억원으로 분기 최대치를 기록했고, AI 매출은 52억원으로 전체의 11.21%까지 상승했다. 전년 동기 AI 매출 비중이 0.04%였던 점을 고려하면 사업 전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수익성도 유지하고 있다. 한컴은 지난해 별도 기준 영업이익 509억원, 영업이익률 29%를 기록했다. AI 사업 확대 과정에서도 기존 소프트웨어 사업의 수익 기반을 지키고 있다는 점은 강점으로 꼽힌다.
한컴의 AI 전략에서 중요한 기술은 문서 데이터 처리다. 대표 제품인 오픈데이터로더(ODL)는 PDF 등 비정형 문서를 대규모언어모델(LLM)이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로 변환하는 기술이다. AI가 기업 내부 문서를 읽고 검색하고 답변하려면 먼저 문서를 구조화된 데이터로 바꿔야 한다. ODL은 이 과정의 앞단을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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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컴에 따르면 지난 3월 공개한 ODL 2.0은 글로벌 문서 처리 벤치마크 4개 부문에서 1위를 기록했다. 종합 정확도는 90%였고, 문서 읽기 순서 인식 94%, 표 추출 93%, 제목 구조 인식 83%를 기록했다. 출시 두 달 만에 개발자 플랫폼 깃허브에서 글로벌 트렌딩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한컴은 다음 단계로 '에이전틱 OS'를 내세우고 있다. 에이전틱 OS는 여러 AI 에이전트를 하나의 환경에서 연결하고 통제하는 운영체제 개념이다. 개별 AI 도구를 따로 쓰는 수준을 넘어, 기업 내부 데이터와 업무 절차에 맞춰 AI 에이전트들이 작동하도록 하는 기반 시스템이다.
한컴은 올해 하반기 에이전틱 OS 베타 버전을 공개할 계획이다. 공략 대상은 소버린 AI 수요가 큰 시장이다. 소버린 AI는 기업이나 기관이 데이터를 외부 빅테크 플랫폼에 맡기지 않고 자체 환경 안에서 AI를 활용하려는 흐름을 뜻한다. 공공, 국방, 금융, 헬스케어처럼 민감 데이터를 다루는 산업에서 관련 수요가 커지고 있다.
한컴은 이미 공공과 기업 분야에서 AI 전환 사례를 쌓고 있다. 최근 한국서부발전에는 AI 문서작성 솔루션 '한컴어시스턴트'를 공급했다. 서부발전의 자체 생성형 AI 챗봇 '위피봇'에 한컴어시스턴트를 연계해 사규, 법령, 업무 매뉴얼, 안전자료 등 약 72만건의 내부 지식 데이터를 활용하는 문서 작성 환경을 구축했다.
BGF그룹에는 AI 지식 검색 시스템을 구축했고, 국회도서관 AX 사업도 수행했다. 국회도서관 사업에서는 180만 페이지가 넘는 문서를 ODL로 데이터화하고 한컴피디아 기반 검색 시스템을 구축했다.
해외 시장은 유럽을 우선 공략한다. 한컴은 폴란드 국가공인 연구개발센터 7불스와 에이전틱 OS 유럽 현지화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폴란드 AI 기업 알고마인과는 공공부문 개념검증(PoC)을 추진하기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유럽은 GDPR과 NIS2 등 데이터·보안 규제가 까다로워 소버린 AI 수요가 상대적으로 큰 시장으로 꼽힌다.
한컴은 유럽 사업 강화를 위해 DACH 지역에서 17년간 활동한 빅터 베네가스 멘도사 이사를 유럽 전략·제휴 총괄로 영입했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중심으로 현지 파트너십과 사업 기회를 넓히겠다는 구상이다.
김연수 한컴 대표는 "사명 변경은 앞으로의 다짐이 아니라 이미 이뤄낸 전환에 대한 확인"이라며 "36년간 쌓은 자산 위에서 한컴을 AI 기업으로 다시 세웠고, 이제 소버린 에이전틱 OS 시장에서 글로벌 표준에 도전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