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개발은 '바이오 산업의 꽃'이라 불리며 꽃이 피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필요하다. 연구위탁개발(R&D) 생태계에서 3대 축은 비임상 CRO(연구수탁기관), 임상 CRO, 그리고 CMO(의약품위탁생산)다. 박수받지 못하지만 묵묵히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 주체가 바로 비임상 CRO다.
국내 비임상 CRO의 역사는 신약 개발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국제적 위상 제고와 제약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 '국제신약특허제도'(의약품특허제도)가 도입되었다. 이에 신약 개발사의 권리보호와 제네릭(복제약) 시장 진입 장벽이 높아지자 정부는 신약개발 비임상연구 인프라 구축에 나섰다. 이에 1987년, 한국화학연구소내에 안전성연구센터(현 KIT,국가독성과학연구소)가 설립되어 국내 신약개발 비임상연구의 출발점이자 비임상 CRO 산업의 뿌리가 되었다.
2000년대 초반 대기업 중심의 CMO 산업이 급성장해 글로벌 무대에 두각을 나타냈지만, 상대적으로 매출 규모가 작은 비임상 CRO는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신약개발의 초기 단계에서 성패를 좌우하는 비임상 CRO는 여전히 '히든 챔피언'이자, 대한민국 신약개발 경쟁력의 핵심 축이다.
문제는 글로벌 환경의 급변이다. 중국은 정부의 전폭적 지원으로 연구(R&D), 비임상 CRO, 분석, CMO 전반에서 빠르게 시장을 확장하며 미국을 위협하는 존재로 부상했다. 위기감을 느낀 미국은 자국 바이오산업의 공급망과 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생물보안법'(Biosecure Act)을 제정했다. 이는 단순한 통상 규제가 아니라, 신약개발 과정에서 생성되는 데이터·노하우·공정기술을 국가안보 차원에서 관리하겠다는 선언이다. 특히 비임상 단계에서 생산되는 독성자료, 분석법, 생산공정 관련 정보는 기업의 핵심 영업비밀이자 자산이다. 그러나 중국 CRO나 CMO 위탁 과정에서 국내 기업의 소중한 기술과 노하우가 유출된 사례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비용 절감과 단기 효율성에만 매몰되어 중국 기업에 의존할 경우, 기업의 미래 경쟁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다.
지난해 12월 18일, 트럼프 대통령의 생물보안법 서명 이후 국내 언론은 주로 CDMO 산업의 반사이익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법의 가장 본질적인 수혜자는 비임상 CRO다. 비임상 연구는 신약개발의 출발점이자, 데이터와 기술이 처음 생성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임상 CRO의 역할은 국가 바이오 안보의 지킴이이자 제약산업 경쟁력 그 자체다.
해외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영국의 세계적 비임상 CRO였던 퀸타일즈(Quintiles)는 한때 동물학대 논란으로 존폐 위기에 몰렸지만, 자국 제약산업 보호라는 전략적 판단 아래 공적 자금 지원으로 회생해 오늘날 50조원에 육박하는 글로벌 헬스케어 기업 아이큐비아(IQVIA)로 성장했다. 선진국들이 자국 CRO를 단순 민간기업이 아닌 제약산업 안보 인프라로 인식하는 이유다.
우리나라 역시 더 이상 기술력에 대한 열등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국내 선두 CRO 바이오톡스텍(3,100원 ▲50 +1.64%)과 KIT는 미국 식품의약국(FDA) GLP 적격승인을 획득하며 해외 규제기관에 글로벌 비임상 자료 제출 역량을 이미 입증했다. 기술력에서 해외 CRO에 뒤처진다는 인식은 예전 상황으로 이들 CRO에 해외 수주가 폭주하고 있다. 2년 전까지도 바이오의약품 개발 시 영장류 시험 비용 문제로 중국 CRO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현재 국내에도 글로벌 '톱 5' 수준의 영장류 비임상 인프라를 갖춘 키프라임리서치가 있다. 이미 주요 고객의 상당수가 해외 기업으로 국제적 신뢰를 받고 있음에도 정작 국내 기업들의 활용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독자들의 PICK!
최근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의 신약수출의 축포가 연일 터지고 있다. 그 이면에는 묵묵히 숨은 조력자로서 회사 가치를 수백배 올려주는 비임상자료를 만들며 신뢰를 쌓아온 비임상 CRO가 있다. 이들은 단순한 수탁기관이 아니라 신약개발 파트너이며 공동 설계자이다. 바이오 안보의 시대! 생물보안법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며 이의 첫 관문을 지키며 신약강국으로 도약을 위해 함께 할 신약개발 연구의 최고 동반자는 자국 비임상 CRO다. 이제 CDMO에 이어, 비임상 CRO 또한 동반성장하여 글로벌 무대에 나설 차례다. 국내 CRO가 글로벌 위탁연구개발 수출국으로서 도약을 위한 마지막 퍼즐은 국내 제약기업의 자국 CRO의 신뢰와 선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