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서재에 놀러왔습니다]'거장신화'

지휘는 권력이고 권력은 신화를 만든다. '클래식, 그 은밀한 삶과 치욕스런 죽음'(마티, 2009)에서 음악 산업의 비정한 논리와 음악계의 냉혹한 인간관계를 날카롭게 포착하고 통렬히 비판했던 영국의 음악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가 근저 '거장 신화'에서 권력과 지휘자의 관계를 분석하며 내린 의미심장한 결론이다.
저자는 음악 산업화가 절정에 도달한 지난 20세기, 즉 음악사에 '지휘자들의 시대'라고 불릴만한 이 짧은 시기에 명멸한 수많은 거장 지휘자들이 어떻게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에 유착하고, 획득한 권력을 무소불위 휘두르며 어떻게 그처럼 허구적인 신화를 만들어 갔는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놀랍고 아찔한 이야기를 특유의 냉소와 야유를 섞어 거침없이 쏟아낸다.
책 속에 등장하는 권력형 거장 지휘자는 대체로 두 부류로 나뉜다. 불굴의 의지와 신념으로 권력과의 타협을 거부했지만 스스로 권력을 창출해 낸 독재자형 지휘자와 선량하고 온유한 품성에 순수한 음악적 목적의식을 지닌 영웅적 지휘자가 그것이다.
미국이 ‘시대의 발명품’으로 신격화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늘 외톨이처럼 고군분투했던 오토 클렘페러가 전자의 대표적인 지휘자라면 후자의 대표는 세기말 빈의 정신적 우상으로 군림한 위대한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와 그의 제자 브루노 발터이다.
토스카니니의 유일한 맞수이자 베를린 필 종신 지휘자로 군림한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와 그가 죽을 때까지 베를린 필 입성을 거부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역시 또 다른 부류의 권력의 상징이다. 푸르트뱅글러는 독일 음악에 대한 충성심과 천성적인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나치 권력에 협조하여 평생토록 비난 받았고, 카라얀도 결국 베를린 필에 입성한 후 독재자와 영웅적 성향을 동시에 가진 기회주의자라는 오명을 얻었다. 하지만 두 거장 모두 권력의 중심에서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 받았다.

이 책은 마에스트로라 불리는 권력형 거장 지휘자들의 삶과 음악을 모두 18개장에 걸쳐 소개한다. 1991년에 영문 초판이 출판된 이후 20세기 지휘계의 동향과 위상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명저로도 유명하다. 경쟁적이거나 적대적인 관계, 스승과 제자처럼 우호적인 관계, 동시대 또는 같은 지역이나 같은 유형의 지휘자를 함께 묶어 소개한 15개장이 주요 부분이다.
나머지 3개장은 음악 산업 속에 실직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연주자 매니지먼트와 끝없이 추락하는 클래식 음악 시장의 현실과 징후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이 책의 은밀한 매력은 지휘자를 지휘한 숨은 권력으로 존재했던 CAMI 사장 로널드 월포드와 카라얀의 밀월관계, 그리고 자본주의의 폐해로 음악계 내부에 나타난 부의 불균형을 다룬 16장이다.
대중에게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며 음악계의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알려진 월포드를 인터뷰 장에 끌어내어 음악산업의 역학관계와 세력의 중심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향후 산업 구조의 변화와 흐름을 정확하게 읽어낸 저자의 노고와 열정은 정말로 감탄할 만하다.
독자들의 PICK!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작곡가, 지휘자, 주변 인물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하고 익숙하지 않은 구미의 여러 오케스트라와 음악단체의 이름도 자주 거론되기 때문에 책 읽기는 꽤 불편하다. 그러나 비교적 풍부하게 활용된 여러 증언과 인용문은 책의 분위기를 더욱 사실적으로 살려낸다.
특히 저자의 폭넓은 음악 지식과 음악계에서 오랜 활동을 통해 얻은 다양한 일화와 많은 정보가 책 전체에 세심하게 담겨있어 마치 지휘자들 각각의 전기나 자서전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다.
◇거장신화=노먼 레브레히트 지음, 김재용 옮김, 펜타그램, 824쪽, 2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