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무 속 여인처럼 거대한 자연을 빌려 진짜 '나'를 찍다

해무 속 여인처럼 거대한 자연을 빌려 진짜 '나'를 찍다

김고금평 기자
2014.11.05 05:48

[인터뷰]사진작가 고현주, 8년만의 신작전 '중산간' 21일까지 전시… "감상 아닌 체험으로 느끼길"

사진작가 고현주의 8년만의 신작전 '중산간' 중 작품 '3-1'. 해무속 파도와 희망과 절망의 구분이 모호한 여인의 뒷모습이 오묘하게 교차돼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사진제공=고현주 사진작가
사진작가 고현주의 8년만의 신작전 '중산간' 중 작품 '3-1'. 해무속 파도와 희망과 절망의 구분이 모호한 여인의 뒷모습이 오묘하게 교차돼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사진제공=고현주 사진작가

파스텔 톤의 물보라, 그 위를 옅게 뒤덮은 해무. 파도의 끝이 닿을 듯 말 듯한 작은 바위 위에 한 여자가 서 있다. 작은 바위의 운명처럼 절망과 희망의 경계에 선 이 여인은 무슨 생각에 사로잡혀있을까.

여자가 바위 위에 서 있는 한, 파도는 몰아칠 생각이 없는 듯하다. 여자도 그렇다. 파도가 거세게 몰아친다해도, 물러설 의향이 없어 보인다.(사진작 ‘중산간 3-1’)

고현주는 "관념과 이성으로 쓴 전작과 달리, 이번 작품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측면이 크다"며 "무엇보다 내 자신이 치유받은 느낌"이라고 전했다. /사진=임성균 기자 tjdrbs23@
고현주는 "관념과 이성으로 쓴 전작과 달리, 이번 작품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측면이 크다"며 "무엇보다 내 자신이 치유받은 느낌"이라고 전했다. /사진=임성균 기자 tjdrbs23@

사진작가 고현주는 이 지점에 주목한다. 어느 것도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경계의 지점, 파도의 속살과 인간의 뒷모습이 만나는 애매한 정체성이 엮은 교착의 상태를 그는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재개발아파트’ 시리즈와 ‘기관의 경관’에 이어 8년 만에 펼치는 고현주의 신작전 ‘중산간(重山艮)’은 숨은진실찾기 게임 같기도 하고, 깨지고 부딪힌 우리네 인생이 뒤늦게 낳은 순응의 교훈 같기도 하다.

5일부터 21일까지 서울 강남의 갤러리 이마주에서 열리는 이 신작전은 전작의 전시와 비슷한 형식으로 꾸며진다. 소위 ‘제한적 감상 강요법’이다. 사진을 한눈에 보는 편한 감상법을 제한하고, 파티션(방해물 벽면)을 설치해 더 이상 뒤로 물러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의 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일반적인 감상법은 한눈에 포착하는 가시거리를 필요로하는데, 제 전시회는 작품이 가로 3m이고, 가시거리는 1m90cm여서 사진을 여러 번 봐야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할 거예요. ‘감상’보다는 ‘체험’을 주자는 게 의도인 셈이죠.”

작품은 지난해 3월부터 1년간 그의 고향 제주도에서 숨겨진 자연들을 찾아내 찍은 것들이다. 얼핏보면 제주도의 멋진 풍광을 그려낸 아름다운 그림들이지만, 그 속엔 왠지 모를 숙연함과 아픔, 잿빛 감성이 한 여인의 등장과 함께 뭉클 솟아오른다. 고 작가가 집념처럼 찾아낸 주제는 풍경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찍는 작가들은 많아요. 풍경은 사실 서양 회화의 개념인데다, 인간의 시각에서 관찰하는 제약적인 관념에서 정의하는 것이지요. 동양의 풍경은 자연과 합일된 인간을 의미해요. 그런 면에서 기존 풍경의 개념에서 더 확장된 공간의 의미로, 어떤 스토리를 만들어갈 수 있느냐에 주안점을 뒀어요.”

스토리의 핵심은 역시 인간이다. 그는 인간이 거대한 자연 앞에 섰을 때, 어떤 느낌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들이 궁금했다. 그리고 인간(여인)이 등장해 거대한 자연을 바라보고, 그 자연의 위대함과 숭고함을 통해 다시 인간의 삶을 성찰하는 반복의 과정이 결국 우리 인생의 자화상이라고 깨달았다.

고 작가는 “거대한 자연앞에 서면 그 자연은 조각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진을 다 찍고나서 알게됐다”며 “그 조각을 여러 번 나눠보면 어느 순간 퍼즐처럼 이미지가 맞춰진다. 제한적 감상법의 의도는 그렇게 출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진작가 고현주의 '중산간' 중 작품 '5-3'. 거대함, 위대함, 숭고함을 지닌 자연앞에서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를 곱씹게 한다. /사진제공=고현주 사진작가
사진작가 고현주의 '중산간' 중 작품 '5-3'. 거대함, 위대함, 숭고함을 지닌 자연앞에서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를 곱씹게 한다. /사진제공=고현주 사진작가

여성, 뒷모습, 바다, 산. 그의 사진 속 자연의 소재들은 결국 그가 살아온 흔적의 결과이고, 스스로를 치유하는 위로의 방법이기도 했다. 지난 14년간 그의 삶은 우울의 연속이었다. 부모가 원하던 음악 교사의 생활도 6년만에 접었고, 남편과도 이혼했다.

2008년 안양소년원에게 카메라를 가르치는 ‘꿈꾸는 카메라’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와중에도 그의 우울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의 선택은 하나였다. ‘꿈꾸는 카메라’에 손댄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새벽 제주도의 바다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무런 희망도 관심도 느껴지지 않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뿐이었어요. 그런데 신기한 건 뛰어들면서 마침 붉은 태양이 떠오르는 장면을 본 거예요. 그때 자연을 통해 비루한 삶을 위로받는 순간이 스쳤다고 할까요? 그 이미지가 너무 잔상에 오래 남아 작업을 다시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죠.”

한줌 태양을 통해 구원받고 살풀이처럼 시작한 새 작업은 그의 많은 걸 바꿔놓았다. 소년원의 삶을 들으면서 자신의 삶은 축복받았다는 죄책감과 그간의 작업이 관념과 이성에 기댄 나머지 소통과 공감 의식을 얻지 못했다는 뉘우침 끝에 그는 닫았던 ‘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치고 외로울 때 바닷가에 나가 혼자 울었던 기억들, 때론 아름다워보이고 때론 쓸쓸해보이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묻어둘 창피함이 아닌 드러내야할 소통의 소재로 쓴 것이다. 그는 ‘뒷모습 이미지’에 대해 “얼굴은 사회적인 코드이자 가면으로 쓰일 수 있는 한계가 있지만, 뒷모습은 다른 색깔의 공유 의식이 깔려있다”고 했다.

사진작가 고현주가 인터뷰 도중 자신의 신작 '중산간'의 작품을 설명하면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다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사진=임성균 기자 tjdrbs23@
사진작가 고현주가 인터뷰 도중 자신의 신작 '중산간'의 작품을 설명하면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다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사진=임성균 기자 tjdrbs23@

“주역 52번째 괘에 나오는 ‘중산간’은 첩첩이 산이라는 의미예요. 앞뒤로 산이 가로막혀있으면 가다가 멈춰야하죠. 현대인들은 그런 지점에서 오히려 조급해하고, 현실과 타협도 하잖아요. 멈춰야할 땐 심호흡하면서 자기 내면과 만나는 시간이 되길 바랐어요. 제가 작품을 하면서 그렇게 치유받았거든요.”

고 작가는 첫 작품집 ‘재개발아파트’에서 현대인의 뒤틀린 욕망을 드러내고, 두 번째 작품집 ‘기관의 경관’에선 권력의 위압적 행태를 고발하는 등 사회의 모순과 위악에 대한 시선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작품을 통해 그는 새로운 방향에 서서 또다른 성장통을 맛보고 있다고 했다.

“관념이나 이성으로 표출되는 작품집은 앞으로 나오기 힘들 거예요. 이번 작품으로 또다른 성장의 길에 들어선 것 같아요. 사진은 제 욕망을 건강하게 지켜주는 매개체이자 자존심이에요. 더 이상 조급해하지 않고 더 담담하게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할까요?”

인간과 한 뼘 거리를 두고 보면 사회의 모순이 보이지만, 한걸음 가까이 다가가면 인간이 보인다. 그가 사람들 속으로 들어왔다. 02-557-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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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금평 에디터

사는 대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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