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끈따끈 새책] 스코틀랜드 시인 캐슬린 제이미의 '시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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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우리가 보는 광경이다. 우리가 듣는 것은 침묵이다. 서서히 우리는 최고로 비범한 침묵에 들어선다. 환하게 빛나는 침묵이다. 산이 내뿜고 얼음과 하늘이 내뿜는 침묵, 아주 먼 곳에서 흘러나와 우리의 몸을 강력하게 짓누르는 무기질의 침묵. 깊고 오싹하여 내 마음은 여기에 비하면 거위처럼 요란해 보인다." (14쪽, '오로라' 중)
"대왕고래가 단연 큰 몸집으로 눈길을 끌었다. 나는 그 아래를 걸으며 몇 걸음이 나오는지 세어보기로 했다. 먼저 양옆으로 부드러운 아치를 그리는 턱과 입천장 아래를 걸었다. 한때 수염이 붙어 있던 곳이다. 이어 단단하고 복잡한 생김새의 두개골과 아래로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고 지금은 공기만 에워싸고 있는 불룩한 가슴뼈가 나왔다." (113쪽, '발살렌' 중)
여행서 혹은 자연의 생태를 관찰한 기록 같다가도 내밀한 경험과 일상의 사유가 녹아든 지극히 개인적인 에세이 같은 느낌도 준다. 스코틀랜드 대표 시인 캐슬린 제이미의 에세이 '시선들'(Sightlines)이다. 그의 에세이가 국내 번역본으로 소개된 것은 처음이다.
그는 북극의 빙하와 오로라, 병리학 해부실, 세계 최대의 고래박물관, 선사시대 유적 발굴지, 피에타 동굴벽화,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킬다 군도와 북극해의 무인도 등을 오가며 바라본 자연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낯선 풍경임에도 시인답게 정제되고 아름다운 문장은 읽는 이들이 순식간에 몰입하게 만든다. 가만히 읊조리는 듯 잔잔하게 이어지는 글은 아들, 딸을 키우는 이야기나 어머니의 죽음 등 개인적인 경험에서 자연으로 시선을 확장한다.
생물학적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현대문명을 비판하며 무조건 "자연으로 돌아가자" 식의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 개인의 삶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자연 세계에 대한 통찰은 얽히고 설킨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묻고 돌아보게 한다.
저자는 앞서 파키스탄 국경지역을 배경으로 쓴 에세이 '무슬림 사이에'로 호평을 받았으며 자연, 여성문제, 고고학, 예술 등을 주제로 새로운 형식의 자연 에세이를 내놓았다. '시선들'은 고향 스코틀랜드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발견들'(Findings)에 이은 두 번 째다.
자연이 일상과 너무 거리가 멀어진 오늘, '시선들'은 쫓기듯 사는 도시의 사람들에게 잠시 한숨을 돌릴 수 있는 틈을 만들어준다. 시인의 섬세한 묘사로 책 속의 풍경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만은 시간이 조금 느리게 흐르는 듯하다.
◇ 시선들=캐슬린 제이미 지음. 장호연 옮김. 에이도스 펴냄. 280쪽/1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