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로 읽는 시대감각] 박물관도 프라다를 입을 수 있을까?

[전시로 읽는 시대감각] 박물관도 프라다를 입을 수 있을까?

이시종 국립세계문자박물관 홍보디자인부장
2026.06.21 06:00
구글 선호 매체 등록 구글에서 머니투데이 추가하기

[키플랫폼 전문가 칼럼] 이시종 국립세계문자박물관 홍보디자인부장

[편집자주] 머니투데이 지식·학습 콘텐츠 브랜드 키플랫폼(K.E.Y. PLATFORM)이 소개하는 전문가 칼럼 코너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지난해 한글날을 맞아 진행한 박천휴 작가 초대 '작가와의 대화' 모습 /사진제공=국립세계문자박물관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지난해 한글날을 맞아 진행한 박천휴 작가 초대 '작가와의 대화' 모습 /사진제공=국립세계문자박물관

지난달 박물관 사람들과 함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를 보았다. 박물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패션 잡지 이야기를 함께 본다는 게 처음엔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자 그 어색함은 금세 사라졌다. 패션지 '런웨이'의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립 분)는 1편에서 패션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다. 20년 만에 돌아온 2편에서, 인쇄 매체는 흔들리고 미란다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지 않다. 영화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권위 있는 브랜드는 어떻게 살아남는가?"

사실 나는 박물관으로 오기 전 오랫동안 여성지 편집장으로 일했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이야기가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았다. 잡지와 박물관은 전혀 다른 세계 같지만, 생각보다 비슷한 질문 앞에 서 있다.

'사람들은 왜 어떤 브랜드를 오래 기억할까.'

프라다는 단순히 옷을 파는 브랜드가 아니다. 애플 역시 단순히 전자기기를 만드는 기업이 아니다. 사람들은 제품만 소비하지 않는다. 그 브랜드가 가진 태도와 철학, 그리고 그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는 감각까지 함께 소비한다. 그래서 좋은 브랜드는 상품보다 먼저, 시대를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대한 자기 답을 제시한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박물관 브랜딩이라는 말은 다소 낯설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뮷즈(MU:DS)는 2025년 연간 매출 약 413억 원을 기록했고, 올해 3월에는 BTS와 협업한 'BTS X MU:DS' 컬렉션까지 선보였다. 박물관 굿즈는 더 이상 어색한 단어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하나 생긴다. 굿즈 브랜드는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는데, 박물관 자체의 브랜드는 무엇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이는 특정 박물관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많은 박물관은 상품 브랜딩에는 빠르게 적응하고 있지만, 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일은 여전히 어려워하고 있다. 박물관의 브랜드는 로고나 슬로건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은 그런 점에서 흥미로운 사례다. 옛 담배공장을 미술관으로 바꾸고, 수장고 자체를 공개 전시의 일부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작품만 보러 가는 것이 아니다. 산업시설이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서사를 함께 경험한다. 공간의 개성과 철학이 곧 브랜드가 된 사례다.

하지만 오늘날 박물관의 브랜드는 공간 안에서만 형성되지 않는다. 지난해 서울을 배경으로 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세계적 화제를 모으며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음악과 드라마를 넘어 전통문화와 역사 콘텐츠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해 연간 관람객 650만 명을 돌파하며 개관 이래 최다 관람객을 기록했다.

눈여겨볼 점은 사람들이 박물관을 찾게 된 계기가 반드시 전시 자체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떤 이는 K-팝 때문에, 어떤 이는 드라마 때문에, 또 다른 이는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박물관의 문을 두드린다. 박물관이 어떤 전시를 하는지뿐 아니라 어떤 문화적 맥락 속에 위치하는지 역시 브랜드의 일부가 된 것이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2024년 한글날을 맞아 연 현대무용가 최수진 팀의 기념공연 모습 /사진제공=국립세계문자박물관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2024년 한글날을 맞아 연 현대무용가 최수진 팀의 기념공연 모습 /사진제공=국립세계문자박물관

브랜드가 형성되는 경로는 점점 복합적으로 변하고 있다. 과거에는 스스로를 설명하며 브랜드를 만들었다면, 오늘날에는 사회와 문화가 함께 브랜드를 만들어간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외부의 이야기가 다양해질수록, 그 안에서 일관되게 인식되는 무언가의 무게가 오히려 더 커진다는 사실이다. 외부의 서사가 어떻게 흘러가든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이 결국 그 박물관이 가진 태도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포스터보다 박물관이 보여주는 태도를 더 오래 기억한다. 어떤 말투로 관람객을 맞이하는가. 어떤 방식으로 전시를 설명하는가. 어떤 가치에 우선순위를 두는가. 브랜드를 만드는 가장 어려운 일은 디자인 작업이 아니라 안에서 쓰는 언어를 맞추는 일이다. 구성원들이 왜 우리가 존재하는지, 어떤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공유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세련된 결과물도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좋은 브랜드는 사람들이 외우는 슬로건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자연스럽게 같은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만들어진다.

영화 속 미란다가 끝내 지키고 싶었던 것도 잡지 자체가 아니라 <런웨이>가 가진 태도와 결이었을지 모른다. 시대가 변해도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 말이다. 영화관을 나오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잡지의 다음 호를 고민하던 사람이 이제는 박물관의 다음 이야기를 고민하고 있다. 자리는 바뀌었지만, 질문은 결국 같았다. 박물관은 프라다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자신만의 태도와 언어를 가진 브랜드는 되어야 한다. 그것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전시 안내문 한 줄이나 관람객을 맞는 인사말처럼 사소해 보이는 곳에서 먼저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좋은 박물관이란 자기만의 시선으로 시대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곳이다.

이시종 국립세계문자박물관 홍보디자인부장
이시종 국립세계문자박물관 홍보디자인부장

필자는 종합여성지 <Queen>과 월간 <문학사상>에서 편집장으로 일했으며 현재 국립세계문자박물관 홍보디자인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박물관 브랜딩과 전시 커뮤니케이션, 문화콘텐츠 기획 업무를 맡고 있으며 '콘텐츠는 인간을 어떻게 움직이는가', '문화기관은 어떤 질문을 남겨야 하는가'에 관심을 두고 있다. 언론과 문화기관 현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콘텐츠와 인간의 관계를 시대 감각의 관점에서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