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7년 평양 남제 산방의 소작농 노만진과 송주화는 지주의 5촌 조카 황노순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386냥을 지불하고 토지를 경작할 권리인 도지권을 매입해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황노순이 그 경작권을 빼앗으려 하자 소를 제기한 것이다. 판결은 소작인의 승이었다. 판사는 황노순에게 "이치에 어긋나는 일로 소를 걸었다"며 곤장 15대 태형을 내렸다.
한국역사연구회에서 발행한 '역사와 현실' 논문(민사판결문을 통해 본 근대 한국의 도지권 분쟁과 처리, 이승일)에 실린 이 사례는 조선 후기 소작농의 지위향상과 함께 변화된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판결의 쟁점인 도지권은 17세기쯤부터 소작인에게 관습적으로 부여된 권리다. 도지권을 가진 소작인은 그 토지를 영구적으로 경작할 수 있었고 소작료도 수확물의 25~30% 정도로 당시 기준에서는 저렴한 편이었다. 일종의 물권으로 인식돼 매매나 상속, 양도도 가능했다.
도지권은 소작농이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둑·제방 축조 등으로 자본이나 노동력을 제공할 때 발생하는 권리였다. 소작인이라도 그가 토지에 기여한 대가를 인정받은 것이다.
최근 '뜨는 상권'에서 벌어지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다. 상인들의 노력으로 인기있는 상권이 만들어지면 임대료가 오르면서 오히려 상인들이 내쫓기는 역설적인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시대 도지권에도 보장된 권리들이 현행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에는 보장되지 않은 탓이다.
현행법에 따르면 임차인이 임대인에게 계약갱신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인 계약갱신청구권은 최초 계약 후 5년까지 보장된다. 5년이 경과하면 건물주는 마음대로 임차 상인을 내쫓을 수 있다. 임대료 인상률은 9%까지로 제한돼 있지만 민법이기 때문에 이를 어겨도 건물주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
홍대, 신촌, 서촌, 가로수길, 대학로 등 뜨는 골목을 만든 장본인들은 급격히 치솟은 임대료에 더 이상 장사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건물주들은 사유 재산인데 뭐가 문제냐는 반응이다. 법이나 의식 모두 조선시대만 못하다.
급등한 임대료로 상인들이 떠난 신촌, 홍대 등은 사람들의 발길이 줄면서 점점 지는 상권이 되고 있다. 공실이 늘면 결국 건물주가 손해다. 상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상가 임대차보호법 개정이 건물주와 상권을 모두 살리는 상생의 길임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