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보다 '안전' 베팅, K-모험자본의 민낯]③
국내 RCPS 투자 풍토와 달리 미국 상환권 없는 투자 중심
"실패 용인 문화가 바탕...창업자에 부담 떠넘겨서 안돼"

벤처투자 본토인 실리콘밸리에서는 스타트업의 실패 책임을 창업자 개인에게 물어 투자금을 회수하는 관행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표적인 벤처투자계약 독소조항으로 꼽히는 '연대보증'도 애초에 자리 잡은 적이 없다. 스타트업 투자의 대부분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출자자부터 운용사, 창업자 모두가 공유하는 문화 덕분이다.
28일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계약을 가장 많이 다루는 로펌 중 한 곳인 '쿨리(Cooley)'의 분기별 벤처투자 보고서를 보면 '상환권' 조항을 삽입한 계약 비중은 매 분기 2~6% 수준이다. 국내 벤처투자계약 대부분이 상환전환우선주(RCPS)로 이뤄지는 것과 대조적이다. 한 국내 대형 벤처캐피탈(VC) 관계자는 "최근 CPS로 작성하는 계약이 조금 늘어났지만 여전히 RCPS 계약이 85~90%를 차지한다"고 전했다.
쿨리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투자 관행은 투자자 보호를 우선시하는 한국과 달리 대체적으로 창업자에게 기울어 있다. 쿨리의 지난해 4분기 기준 계약의 98%가 투자금의 100%만 우선 회수하는 조건이었다. 전체 계약의 96%는 원금 회수와 지분율 배분 중 하나만 택할 수 있는 '비참가적 우선주'였다.
리픽싱은 격차가 더 크다. 2024년 3분기 쿨리 집계에 따르면 이 시기 전체 투자 계약에 가중평균 방식이 적용됐다. 한국에서 널리 쓰이는 최저가 방식(풀래칫)을 적용한 계약은 한 건도 없었다. 최근 중소벤처기업부가 표준계약서 개정을 통해 권고한 가중평균 방식이 미국에서는 이미 표준으로 굳어져 있는 셈이다.
이 같은 창업자 중심 계약 관행은 실패를 용인하는 실리콘밸리 벤처투자 문화의 토대 위에서 생겨났다는 게 정설이다. 김성훈 법무법인 미션 변호사는 "실리콘밸리 VC 대표에게 미국에는 왜 연대책임 조항이나 풋옵션이 없는지 물었더니 '원래 없던 걸 왜 없냐고 물어보니 당황스럽다'고 하더라"며 "벤처 스타트업의 99%가 위험한 일에 도전하다 실패하는데 그때마다 연대책임을 물으면 누가 창업할 수 있겠냐는 반문이 돌아왔다"고 전했다.
투자자가 조건을 마음대로 정할 수 없는 시장 구조도 작용한다. 유망한 스타트업일수록 투자자를 고를 수 있어, 창업자에게 불리한 조건을 내거는 투자사는 좋은 딜에 들어가지 못한다.
한 VC 투자심사역은 "실리콘밸리에 투자자 안전 장치가 국내보다 적은 것은 투자자들이 관대해서가 결코 아니다"며 "실패가 기본값인 시장에서 회수를 개인에게 떠넘기는 방식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태계 전체가 학습한 결과에 가깝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