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무슨일이?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총 306 건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유가 고작 피부색 따위여서는 안된다" -피 위 리즈(브루클린 다저스 주장·야유를 받고 있는 재키 로빈슨에게 다가가 포옹 한 후)- 한 선수가 걸어 나왔다. 함성으로 가득 차 있던 경기장은 순간 얼어붙은 듯 정적에 잠겼다. 이내 야유와 모욕적인 말들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2만6000여명의 관중들이 내뱉는 욕지거리를 견뎌 보려는 듯 선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는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이었다. 본명은 잭 루스벨트 로빈슨. 야구·농구·미식축구·육상 거의 모든 운동 종목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하지만 어떤 종목이든 프로 리그에서 활약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흑인이었다. 야구에 뜻을 둔 그에게 허락된 것은 ‘메이저리그’가 아니라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라틴계 미국인의 리그인 ‘니그로리그’였다. 하지만 재키 로빈슨의 활약을 눈여겨보던 메이저리그의 브루클린 다저스는 조심스럽게 그를 영입하고자 했다. 물론 순조롭지 않
길이 270m, 폭 28m, 높이 30m, 무게 4만6000톤으로 1912년 당시 세계 최대 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는 그해 4월 10일 영국 사우샘프턴을 떠나 미국 뉴욕으로 첫 항해를 시작했다. 배에는 승객 1316명과 승무원 908명이 타고 있었다. 타이타닉호는 캐나다 동해안으로 향하는 동안 다른 선박으로부터 '빙산을 조심하라'는 무전 통신을 다섯 차례나 받는다. 104년 전 오늘(1912년 4월14일) 밤 11시쯤, 여섯번째 경고 전보가 왔지만 선원은 이를 무시했다. 북대서양 항해 시 자주 있는 일로 판단하고 빙산 경고를 대수롭지 여긴 것. 전보 접수 40분 후,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타이타닉호는 거대한 빙산과 충돌해 선박 우현에 큰 손상을 입게 된다. 해운 역사상 최악의 참사가 발생하는 순간이었다. 충돌로 인한 흔들림 탓에 아랫층 3등실의 승객들은 대부분 잠에서 깼지만, 위층 1등실의 승객들은 흔들림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한국의 '전설의 투수'로 불렸던 장명부의 말년은 쓸쓸했다. 그는 2005년 56세에 일본 와카야마 현에서 홀로 운영하던 마작하우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마약 중독. 그가 죽기 전 남긴 짧은 글귀는 그의 롤러코스터 같았던 삶을 대신했다. 장명부는 한국프로야구에 다시 나올 수 없는 기록(한시즌 30승)을 세우며 승승장구했던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길은 외롭고 초라했다. 그는 1950년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다. 야구에 두각을 나타냈던 장명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9년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다. 첫해에는 번외 투수로 입단했지만 2년째 되는 해에 1군으로 승격해 활약했다. 3년 후 그는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해 7승을 올리는 등 주요 선수로 활약한다. 장명부는 1977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이적해 선수 절정기를 맞이한다. 1978년, 1980년 15승을 기록했고 팀 히로시마 도요 카
5년 전 오늘(2011년 4월12일) 오후 4시50분 이후 농협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이용하던 고객들은 당황스러운 상황에 빠졌다. '오류로 처리가 불가능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카드가 자동으로 기계 밖으로 배출돼서다. 인터넷뱅킹도, 폰뱅킹도 마찬가지였다. 3000만명의 고객이 이용하던 농협의 모든 전산서비스가 먹통이 된 것. 당장 계좌이체나 출금서비스를 이용하려던 사람들은 처음엔 단순 고장인가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자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농협은 곧장 "전산사고가 일어났고 IBM서버(중계서버)의 장애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며 "해킹으로 인한 사고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농협은 왜 전산마비 사태가 벌어졌는지 등 실상에 대해선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완전 다운됐던 인터넷뱅킹과 폰뱅킹, ATM 등은 이튿날 새벽부터 복구됐지만, 체크카드결제 등 일부 거래는 수일이 지나도록 복구되지 않았다. 전산 마비 1주일 동안에만 30만건 넘는 민원이 접수됐다
1960년대 한국 영화계는 '이 사람이 손을 댄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로 나뉜다는 말이 있었다. 이 사람은 전후 혼란기 작품성과 흥행성을 고루 갖춘 영화를 발표하며 당시 영화계를 이끌었던 신상옥 감독이다. 1925년생인 신 감독은 최인규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한 뒤 1952년 '악야'(惡夜)를 연출하면서 감독으로 데뷔했다. 1953년 영화배우 최은희와 결혼하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영화제작자이자 감독, 촬영기사로 활동하면서 68편을 감독하고 169편을 제작하면서 1960~1970년대 한국 영화계를 이끌었다. 특히 신 감독은 미학적인 완성도와 탁월한 대중 감각으로 한국형 장르 영화의 르네상스를 열었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1960년 '로맨스 빠빠'에 이어 1961년 한국영화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성춘향' '상록수' '연산군' 등을 내놓는다. 1962년부터 1969년까진 '폭군 연산' '강화도령' '로맨스 그레이' '빨간 마후라' '벙
조선시대 명문가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간 '묘지전쟁'은 392년 만인 2006년 이른바 '평화협정'을 맺으며 마무리됐다. 영조의 중재 명령도 받아들이지 않고 유배까지 가며 이어오던 갈등은 결국 두 가문이 한발씩 물러나는 것으로 해결됐다. 2006년 4월10일 두 문중의 후손들은 문화재청의 중재로 한 테이블에 앉았다. 이 자리에서 청송 심씨측이 심지원묘 등 19기를 인근으로 이장하고 파평 윤씨측은 이장에 필요한 부지 2500평을 조건없이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두 명문가간 질긴 싸움은 1614년에 시작됐다. 청송심씨의 수장으로 영의정까지 지낸 심지원(1593~1662)이 사패지지(임금이 내려준 땅)에 자신의 부친 등 일가 묘를 조성했는데 이 과정에서 부근에 있던 파평 윤씨인 윤관 장군묘를 파헤치게 된 것이다. 파평윤씨 일가는 이에 반발해 100년이 지난 1763년 심지원의 묘 일부를 파헤쳤다. 청송 심씨 일가와 파평 윤씨 일가는 상대가 서로의 조상묘를 훼손했다며 처벌을 요구했다
"비틀스는 끝났으며 앞으로 공동 녹음은 없을 것이다." 1970년 4월10일, 비틀스의 멤버 폴 메카트니는 자신의 솔로 앨범을 소개하는 언론 인터뷰에서 불현듯 비틀스 '해체'를 선언했다. 폴 메카트니와 존 레넌, 링고 스타와 조지 해리슨이 함께 1962년 'Love Me Do(러브미두)' 첫 앨범을 시작으로 전세계에 영국 록 바람을 불러일으킨 지 꼭 8년 만이었다. 비틀스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밴드였다. 비틀스가 세운 기록은 여전히 '난공불락'이다. 비틀스는 16억장 앨범을 판매에 전세계 최대 앨범 판매 기록을 세웠고 빌보드 차트 1위 보유곡도 20곡으로 가장 많다. 비틀스는 영국 그룹임에도 미국에서도 절대적인 지지를 얻으며 승승장구했다. 미국에서 1000만장 넘게 판 가수나 그룹에게 주는 다이아몬드 인증을 받은 앨범이 총 6개다. 비틀스의 히트곡들은 전세계 3000여명의 가수들이 리메이크해 불렀다. 요즘 젊은 층들도 비틀즈의 노래가 귀에 익숙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틀스는 요
"사람을 매도해 가지고 하루아침에 잡범으로 만드는 그게 말이 됩니까. 그냥 그게 제일 가슴이 아파요. 그래서 내가 희생이 되고 죽는 한이 있어도 내 목숨으로 내가 대처를 하려고요.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진실과 진실의 고백이 남들에게 인정이 안 되지 않습니까." "마음 강하게 잡으셔야 됩니다."(고 성완종 회장 마지막 통화 녹취록 중) 지난해 4월9일 새벽 6시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한 일간지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50여분간 이어진 통화에서 성 전 회장은 해외 자원외교 비리 의혹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세상에 알려달라. 꼭 보도해달라." 그는 몇 차례나 이같이 당부했다. 이날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있던 그는 이후 행방을 감췄고 같은 날 오후 3시32분 북한산 형제봉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성 전 회장의 상의 주머니에선 여권 정치인 명단과 돈의 액수 등이 적힌 메모지가 발견됐다. 메모에는 '허태열(전 청와대 비서실장) 7억, 홍문종(전 새누리당 사무총장) 2억,
1975년 4월8일 인민혁명당(이하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 관련자 중 8명의 사형이 확정됐다. 그로부터 18시간이 지난 4월9일 새벽 6시, 이들 8명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건은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4년 8월1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북괴의 지령을 받은 지하조직 인혁당 일당 41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사건 담당 검사들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기소를 거부했다. 담당 검사 3명이 사표를 내는 갈등 끝에 1차 인혁당 사건은 6명이 징역 1년, 5명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1974년 4월3일 박정희 대통령이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면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4월25일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을 ‘불순 반정부세력’으로 규정하며 1024명을 영장 없이 체포했다.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도 재수사 대상이었다. 비상보통군법회 검찰부는 5월27일
'우리 신문이 한문은 아니쓰고 다만 국문으로만 쓰는것은 상하귀천이 다 보게 함이라. 또 국문을 이렇게 구절을 떼어 쓴즉 아무라도 이 신문을 보기가 쉽고 신문 속에 있는 말을 자세히 알아보게 함이라.'(1896년4월7일 독립신문 창간사 중) 120년 전 오늘(1896년 4월7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이 창간됐다. 서재필이 독립협회 기관지로 창간한 독립신문은 총 4페이지로 구성됐다. 제호(신문 이름)부터 3면까지 순한글이고 마지막 1면은 영문판(인디펜던트)이다. 독립신문 영문판은 당시 외국인에게 조선의 사정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창간 이듬해인 1897년 1월 5일부터는 국문판과 영문판을 분리해 두 가지 신문을 발행했다. 독립신문은 처음으로 가로 제호와 한글 전용, 띄어쓰기 등을 도입했다. 이는 국내 근대 개화 운동사와 언론사, 국어사 등 개화기 각 분야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창간사에선 '전국 인민을 위해 무슨 일이든 대변자가 되고 정부가 하는 일을 백성에
1800년대에 들어 유럽 전역에선 소규모 스포츠 행사가 개최돼왔다. 유럽의 교육자들은 여러 나라 청년들이 함께 운동경기를 하면서 세계평화 정신을 공유할 수 있는 이벤트의 필요성을 느꼈다. 윌리엄 페니 브룩스 박사와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은 이를 위해 전세계 국가가 여러 스포츠 경기를 하는 '무엇'을 만들기로 한다. 이들이 선택한 것은 이교도의 종교행사로 지목돼 393년 이후 폐지된 '올림픽의 부활'이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쿠베르탱은 민간후원자를 물색한 끝에 그리스 사업가인 자파스 일가의 자금지원을 받아 경기장 건설을 비롯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스 국민들도 대회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헌금운동을 벌였다. 대회 초청장은 쿠베르탱이 직접 작성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들도 많은 선수를 참가시키기 위해 전세계를 누비며 유치작전에 들어갔다. 이 같은 노력 끝에 120년 전 오늘(1896년 4월6일) 그리스 아테네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에서 6만여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리스 국왕
2005년 4월4일 오후 11시50분쯤 강원 영동에 건조주의보와 강풍주의보가 내려진 가운데 양양군 강현면 사교리 일대 야산에서 산불이 발생했다. 이튿날인 11년 전 오늘(2005년 4월5일) 아침 산림청과 국군은 헬기 10여대를 긴급 투입해 진화 작업에 나섰다. 불길은 아침 7시쯤 바람을 타고 낙산해수욕장까지 번졌지만 오전 11시20분쯤 큰 불이 잦아들면서 주민들은 속속 집으로 돌아와 가재 도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화재진압 중이던 18대 헬기 가운데 산불진압용 헬기 7대는 때마침 화재가 발생했던 고성으로 향한다. 하지만 잦아지던 불길은 오후 1시쯤 어른이 서 있지 못할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면서 되살아났다. 헬기도 다시 양양으로 기수를 돌린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오후 2시30분 양양군은 재난 경보를 발령했지만 오후 3시쯤 낙산사 주변 송림으로 번진 불은 낙산사 서쪽 일주문을 태운 뒤 대웅전에 옮겨붙었다. 신라 문무왕 때이던 671년 의상대사가 창건해 1334년의 역사를 지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