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마케팅' 이상도 이하도 아닌 '강연회 강행군' 대부분 강연은 신장섭 교수가 진행

78세 노기업인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단상에 오르는 것도 힘겨워보였다. 자신의 이름이 붙은 강연회였지만 대부분의 강연은 다른 이가 맡고, 당사자는 준비된 원고를 5분 가량 읽어내려갈 뿐이었다. 이날 강연이 끝난 뒤 취재진이 질문을 해도 땀을 흘리며 "됐어, 됐어"만 반복했다. 목소리를 높여 말하는 자체가 힘들어보였다.
지난 8월 국내에 들어와 IMF 구제금융 당시 경제관료들과 '대우그룹 기획해체설' 진실공방을 벌이고 있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본 이들은 하나 같이 "많이 늙으셨다"며 안타까워했다. 김 전 회장은 지난 8월 23일 입국한 뒤 기력이 쇠해져 아주대병원에서 이틀 동안 치료를 받기도 했다.
이후 8월 26일 대우포럼, 9월 16일 아주대, 9월 24일 아주자동차대, 9월 25일 거제상공회의소, 그리고 2일 연세대 초청으로 강연을 다니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이날 강연에 앞서 '김우중과의 대화'를 펴낸 신장섭 국립싱가폴대 교수는 "회장님께서 말씀을 많이 못하시는 사정이 있는 관계로 회장님 소개 등을 제가 진행하겠다"고 한 뒤 대부분의 강연 시간을 진행했다. 사실상 '김우중' 이름을 빌린 신 교수의 강연회였다.
김 전 회장이 직접 대우그룹 해체비화에 대해 밝힐 것으로 예상하고 강연장을 찾은 일부 학생들은 실망하는 눈치였다. 신 교수의 강연이 길어지자 가방을 들고 빠져나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한 연세대 학생은 "상경대 창립 100주년 기념 동문 강연이라고 해서 왔는데 정작 김우중 회장님은 말씀을 많이 안하셔서 아쉽다"고 말했다. 이날 사회자가 신 교수의 강연 전 김 전 회장에게 인삿말을 주문했으나 생략한 채 넘어가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은 준비된 원고를 통해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한 조건', '국내 경제상황의 근원적 이유' 등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간략히 피력했다. "IMF 당시 잘못된 구조조정으로 경제구조가 나빠졌다"며 그 내용은 신장섭 교수가 펴낸 대담집 '김우중과의 대화'에 담겨있다고 했다.
오전 10시부터 줄서서 강연장을 들어오는 학생들 손에는 연두색 팜플렛이 들렸다. '김우중과의 대화' 소개문이었다. 행사를 주최한 연세대 상경대 관계자는 "학생들에게 책을 무료로 나눠주기 위해 500권을 준비해놨다"고 말했다.
신 교수와 김 회장의 열띤 강행군 덕분인지 '김우중과의 대화'는 지난 8월말부터 대부분의 온라인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순위권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책이 많이 팔리면 팔릴수록 김 전 회장의 기력은 쇠하는 모양새다.
독자들의 PICK!
일부 대우인들 사이에서는 "회장님 억울한 목소리 이만큼 냈으니, 이제 그만하셔도 되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DJ정부 경제관료들에 대한 비판, 추징금에 대한 헌법소원 추진 등이 이미 진행되므로 노구를 이끌고 강연회 이름을 빌린 출판기념회에 동원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날 연세대 강연이 끝난 뒤 취재진의 질문을 제지하며 김 전 회장을 의전차량에 태우는 이들은 대부분 옛 대우그룹 비서실 출신들이었다.
가장 젊은이도 50대가 넘은 나이로 보였다. 사진기자들 틈에서 셔터를 눌러대던 흰 머리의 사진사는 '옛 대우 홍보실 직원'이라고 했다. 김 전 회장의 강행군이 계속될수록, 그의 의전을 책임지던 옛 대우맨들도 점점 늙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