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에는 '양손잡이' 피가 흐른다

한국 기업에는 '양손잡이' 피가 흐른다

김지산 기자
2015.06.22 06:00

[창간기획]강한 추진력 바탕으로 한 신사업 도전으로 고도성장 견인

1997년 한국을 강타한 외환위기를 계기로 기업의 '문어발식 경영'이 도마에 올랐다. 연관성이 적은 분야도 가리지 않고 사업을 확장했다는 비판이었다. '백화점식 경영'이라고도 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기업 경영 트렌트는 전후방 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수직계열화'로 바뀌었다. 현대·기아차가 자동차 강판을 생산하는 현대제철을 설립한 것이나 자동차를 운반하는 현대글로비스를 만드는 식이었다.

그러나 해운 시황 악화로 해운과 조선을 축으로 하던 STX그룹이 와해되면서 수직계열화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됐다. 기업들은 묻는다. 문어발식 경영은 죄악인가.

삼성전자가 메모리반도체의 시작을 알리는 1라인을 1984년 5월에 준공했다. 고 이병철 선대 회장(앞줄 왼쪽 3번째)을 비롯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앞줄 첫번째와 두번째 사이에 보이는 사람) 등이 참석했다./사진제공=삼성전자
삼성전자가 메모리반도체의 시작을 알리는 1라인을 1984년 5월에 준공했다. 고 이병철 선대 회장(앞줄 왼쪽 3번째)을 비롯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앞줄 첫번째와 두번째 사이에 보이는 사람) 등이 참석했다./사진제공=삼성전자

◇고성장 신화의 키워드 '양손잡이'

한 대기업 관계자는 "'문어발식 경영'이라는 비아냥거리는 표현을 수정해야 한다"며 "기존 사업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한 기업들의 지난날은 '양손잡이 경영'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양손잡이 전략의 대표적 사례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등 식품·섬유 사업에 가전제품(삼성전자) 등이 주력이던 삼성은 1983년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기존 사업들의 경쟁력은 충분했다. 그러나 고 이병철 회장은 임원들의 만류에도 사업을 강행, 오늘날 세계 메모리반도체 1위 신화를 만들어냈다.

사업 진출과 동시에 4K, 16K, 32K 등 단계를 거치지 않고 64KD램을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만들어냈다. 1994년에는 세계 최초로 256MD램 개발에 성공한 이후 삼성전자는 세계 메모리 반도체 기술시장을 이끌고 있다.

옛 현대그룹의 조선사업 진출도 같은 맥락이다. 건설과 자동차에서 각각 국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지만 고 정주영 회장은 한국에선 전혀 생소한 조선업에 뛰어들었다. 오늘날 세계 1등 현대중공업도 양손잡이 전략의 산물인 셈이다.

내수에서만큼은 위험요소가 거의 없는 정유사업으로 입지를 구축한 SK도 이동통신 사업에 뛰어들어 통신을 그룹의 주요 사업축으로 성장시켰다. 하이닉스 인수를 통한 반도체 사업 진출로 SK는 또 한 번 도약의 기틀을 완성시켰다.

◇성공 원동력은 과감하고 빠른 의사결정

한국이 한국전쟁 이후 짧은 시일 내에 오늘날 글로벌 기업들을 다수 보유하게 된 것도 양손잡이 전략의 결과다. 그 중심에는 세계 시장을 겨냥한 과감한 투자와 투자를 결행하기까지 빠른 의사결정이 있었다. 재벌 폐단으로 비판 받기도 하지만 총수 중심 경영이 있기에 가능했다.

양손잡이 경영과 의사결정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례 하나. 2008년 런던 소재 소프트웨어 기업 마이시스의 마이크 로리 CEO(최고경영자)는 임원들에게 경제위기를 헤치고 나갈 계획을 만들라고 요구했다. 임원들은 1년 전 로리 사장이 주도한 프로젝트 '마이시스 오픈 소스 솔루션스'에 들어가는 연간 300만달러 자금투입을 중단하라는 답을 내놓았다.

금융과 의료 업계에 소프트웨어 서비스를 하던 마이시스는 품질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로리 사장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많은 이해 관계자들간 원활한 데이터 교환을 가능케 하는 오픈 소스만이 살 길이라고 역설했지만 임원들은 기존 사업 지키기에만 급급했다.

임원들을 설득해 신사업을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의사결정 과정을 둘러싼 조직의 에너지 분산은 낭비요인으로 지적된다.

◇저성장 시대, 기업들은 고민 중

양손잡이 경영은 오늘날 기업 모두에 부여된 숙제다. 거의 모든 산업은 기술 진입 장벽은 높고 그나마 경쟁 참여가 용이한 산업은 저수익·범용 제품이 대부분이다. 이런 산업군은 이미 중국이 점령했다. 빠른 추종자(fast follower) 전략은 이제 옛날 얘기다.

기업들의 고민은 여기서 출발한다.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면서 기존 사업 지키기조차 힘에 부친다. 이사회 기능이 강화되고 주주자본주의가 정착되면서 총수·CEO의 힘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그렇다보니 검증되고 위험이 적은 사업들에만 눈을 돌려 골목 상권 침해 논란도 나온다.

성장시대를 이끌어온 기업가 정신에 창조적 혁신의 옷을 입혀야 한다는 의견이다. 단기 성과주의를 배척하고 실패를 용인해주는 기업 문화 위에 창의적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정부와 기업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재계 관계자는 "사업이나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비용낭비로 간주하고 경영책임을 묻는 풍토를 바꾸는 게 중요하다"며 "창의적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선 교육개혁이 동반돼야 한다는 점에서 정부도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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