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아산 정주영 타계… 민간 외교관·사회사업가로도 활동


"나는 생명이 있는 한 실패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있고 건강한 한 나한테 시련은 있을지언정 실패는 없다."(정주영 현대그룹 전 명예회장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중)
'그저 좀 부유한 노동자'이자 '민간 외교관'이자 '사회 사업가'이기도 했던 한 대기업 총수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갔다. 2001년 3월21일. 당시 서울 중앙병원은 "정주영 현대그룹 전 명예회장이 폐렴 합병증인 급성호흡부전증으로 3월21일 오후 10시경 사망했다"고 밝혔다.
그의 사망 소식 이후 국내는 물론 주요 외신들은 "한국경제의 변혁을 이끈 인물이 타계했다"고 앞다퉈 보도했다.
정 전 회장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와 운명을 같이 했다. "옆도 뒤도 안보고 그저 죽자고 일을 했더니 쌀가게 주인이 됐고 또 정신없이 일만 했더니 건설회사도 만들게 됐고 그렇게 평생을 살다 보니까 오늘에 이르렀다"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1998년)는 그의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강원도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나 소학교(초등학교)만 나온 정 전 회장은 농사일을 이어받기 바라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차례 가출을 한다. 하지만 늘 부친의 손에 이끌려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19세 때 마침내 가출에 성공한 그는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복흥상회라는 쌀가게에 취직했고 1938년 중구 신당동에 자신의 쌀가게인 '경일상회'의 문을 열었다.
쌀가게로 돈을 모은 정 전 회장은 2년 후 서대문구 아현동에 자동차 수리 공장인 아도써비스를 창업했고 이후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로 사업을 확대했다. 다음해 현대건설을 설립했지만 6·25전쟁이 터지면서 자동차 수리업과 건설업 사업 기반이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고 정 전 회장은 전쟁 이후 복구 사업에 참여하면서 다시 한번 기회를 잡는다. 1957년 국내 최대 단일공사였던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맡으면서 현대건설은 대형건설업체로 발돋움했다. 1962년에는 단양 시멘트공장으로 시멘트 제조업에 진출하기도 했다.
1965년에는 태국 파타니 나리왓 고속도로공사를 따내면서 국내 최초 해외건설시장에 진출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주도할 수 있었다.
독자들의 PICK!

같은 해 현대자동차를 설립한 정 전 회장은 미국 포드사의 모델인 코티나를 조립·생산하면서 본격적인 자동차 산업에 진출했다.
1972년 창업한 현대중공업은 전 세계가 정 전 회장을 주목하게 된 계기가 됐다. 당시 국내에선 대형 선박 건조 경험이 전무했던 상황. 하지만 그는 현대중공업 공장을 건설하는 동시에 26만톤급 대형 유조선 2척을 건조해 냈다.
조선소 건설부터 배를 건조하는 데 걸린 기간이 2년3개월밖에 걸리지 않은 것. 이는 세계 선박 건조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1976년에는 한국 최초의 자동차 고유 모델인 '포니'를 수출하며 본격 국내 자동차 시대를 열었다. 1983년에는 현대전자를 설립했다.
정 전 회장은 기업 총수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다방면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구 소련과 중국 등을 방문해 이룬 경제 교류를 양국 수교로 이어지게 했고 서울올림픽을 유치·개최했으며 사회복지재단을 만들어 의료·학문·문화·복지 등에 지원했다.
특히 1998년 6월에는 통일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통과해 북한을 방문하는 역사를 기록했고 이후 금강산 관광까지 성사시켰다. 이처럼 드라마 같은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정 전 회장의 실생활은 너무나 검소했다.
구두값을 아끼기 위해 구두밑에 쇠징을 박고 다녔던 일, '배도 안부른 담배를 뭐하러 피느냐'며 담배엔 손도 대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다. '재벌 총수 집에 금송아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집에 도둑이 들었다가 가져갈 게 아무것도 없자 부인에게 화를 내고 달아났다는 일화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