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GE를 삼킨 고구마 세탁기

[광화문]GE를 삼킨 고구마 세탁기

송기용 부장
2016.01.27 04:00

"세탁기 배수관이 자꾸 막히는데, 빨리 조치해달라." 1996년 중국 서부 내륙의 쓰촨성에서 하이얼 수리센터로 세탁기 고장신고가 잇따랐다. 불량 냉장고 76대를 해머로 부숴버릴 정도로 품질제일주의를 내걸었던 하이얼은 즉각 조사에 착수했다.

확인 결과 세탁기 품질 문제가 아니라 소비자 잘못으로 드러났다. 농민들이 하이얼 세탁기를 옷 세탁에만 쓰지 않고 고구마 등 농산물을 씻는데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농산물 찌꺼기와 진흙이 쌓여 세탁기 배수구가 막힌 것이다. 하이얼 AS 기사는 배수관을 넓혀주며 "의류를 제외한 물건을 세척 하는데 세탁기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중국 전역의 농촌에서 비슷한 고장 신고가 이어지자 농민들에게 올바른 세탁기 사용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하지만 장루이민(張瑞敏·67) 하이얼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상황을 보고받은 장 회장은 "농민 고객을 위해 고구마도 씻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세탁기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하이얼 내부에서는 거센 반발이 일었다. 소비자들의 사용 부주의까지 책임져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내부 불만을 잠재우고 2년의 시간을 투입한 끝에 세탁기가 완성됐다. 고구마와 과일, 조개까지 씻을 수 있게 만들어진 이 세탁기는 출시와 동시에 전국적 화제가 됐고 판매물량이 완판되는 인기를 끌었다.

"고구마를 세척할 수 있는 세탁기를 만든다? 외국인들이 들으면 배꼽 잡고 웃을 일입니다. 하지만 중국 현실은 달라요. 힘든 개발과정을 거쳐 출시된 고구마 세탁기에 대한 고객 호응은 폭발적이었고, 이 성공은 우리가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됐습니다." 장루이민 회장은 훗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고구마 세탁기 개발 의미를 이처럼 회고했다.

칭다오의 작은 냉장고 회사에서 출발한 하이얼이 불과 30년 만에 매출 36조원(2014년 기준), 종업원 7만 명을 고용한 세계 최대 가전 회사로 성장한 데는 이처럼 "고객은 항상 옳다"는 장루이민 회장의 고집스러운 경영철학이 있었다.

오직 고객만 보고 정진한 하이얼은 지난 15일 세계 IT 업계를 깜짝 놀라게 한 초대형 인수합병(M&A) 계약을 체결했다.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이 1878년 설립한 '미국의 자존심' 제너럴일렉트릭(GE) 가전 부문을 54억 달러(약 6조4800억원)에 인수한 것이다. GE 인수로 하이얼은 중저가 이미지를 벗어나 프리미엄 가전 시장에서 삼성, LG 등과 정면 승부 할 수 있게 됐다.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활동하는 '홍색(紅色)자본가'와 고객중시 경영은 얼핏 양립하기 어려운 존재로 보인다. 유아 생명을 위협한 멜라닌 우유 파동, 폐타이어로 만든 버블티 등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적인 중국발 기사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중국에는 고객중시 철학으로 무장한 제2, 제3의 장루이민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알리바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고객이고, 둘째가 종업원, 셋째가 경영진이다." 중국 온라인 쇼핑 시장의 80%를 장악해 아마존을 꺾고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로 부상한 마윈 알리바바 회장은 '고객 제일주의'를 습관처럼 얘기한다.

"우리의 사명은 좋은 제품을 모든 사람이 살 수 있는 가격에 만드는 거다." 연간 4억만 대 규모의 세계 최대 스마트폰 시장 중국에서 삼성전자, 애플을 제치고 1위에 오른 레이쥔 샤오미 회장의 저가정책을 단순히 싸구려 제품 양산 전략으로만 판단해서는 안된다.

눈을 돌려 한국을 보자. 고객중시 철학을 일관되게 실천하는 경영자가 누구인가? 선뜻 떠오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원가절감을 명분으로 소비자를 경영의 중심에 놓지 않는 최고경영자(CEO)들에게 "소비자는 항상 옳고,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장루이민 회장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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