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한양 재천도서 보여준 명분용 절차의 중요성

[투데이 窓]한양 재천도서 보여준 명분용 절차의 중요성

이기봉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관
2025.10.31 02:05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관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관

"내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경험이 있으니 지금 수도를 옮기는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지 어찌 모르겠느냐. 하지만 개성은 고려 왕씨의 옛 수도이니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다. 얼마 전 정종 임금이 한양에서 다시 개성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나의 뜻을 따른 것이 아니다."

'태종실록' 1404년 9월1일의 기록으로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에게 한양 재천도 의사를 내비치자 태조가 한 말이다. 한양 천도는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판단해 큰 어려움을 알면서도 실행했다는 것이다. 정종이 개성으로 되돌아갈 때 막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뜻은 계속 한양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태종 이방원의 한양 재천도를 적극 찬성하니 그대로 실행하라는 의미다.

정종이 개성으로 되돌아갈 때 당시 실권자였던 이방원 또한 반대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그런 태종이 1400년 11월 임금의 자리에 오른 후 아버지 태조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정성을 다했음에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자 아버지가 가장 좋아할 만한 한양 재천도를 꺼낸 것이다. 아버지의 찬성의견을 들은 태종은 의정부에 곧바로 이렇게 명했다.

"서울은 우리 태상왕(태조)이 창건한 땅이고 사직과 종묘가 있으니 오래 비워두고 거주하지 않으면 선조의 뜻을 계승하는 효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년 겨울에는 내가 마땅히 수도를 옮길 테니 응당 궁궐을 수리하게 하라."

곧바로 한양이궁건설특별위원회(漢京離宮造成都監)를 설치하고는 9월9일에 풍수지리 전문가인 상지관들을 보내 이궁터를 살펴 보고하도록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한양 재천도와 이궁의 건설 등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을 것 같은 느낌이지만 곧 신하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한양 재천도는 받아들이겠지만 경복궁이 있는데 굳이 이궁을 건설하는 것까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태종은 경복궁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으려 했기에 한양 재천도 자체를 반대하는 논리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한양이궁건설특별위원회를 폐지하고 경복궁을 수리보수하는 궁궐리모델링특별위원회(宮闕修補都監)를 설치하는 것으로 후퇴했다.

왕조시대의 임금은 지존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밀어붙이면 될 것 같이 여기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신하들의 동의 없이 그런 일이 반복되면 쿠데타가 일어나 쫓겨나는 것은 연산군과 광해군의 사례가 잘 보여준다. 태종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는 가장 믿음직한 신하 하륜과 함께 아버지 태조의 한양천도 과정을 벤치마킹했다. 9월19일 무악천도에 대한 하륜의 상소가 올라왔고 26일 신하들과 함께 무악 현지답사를 실행하면서 무악천도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논박하여 개성·무악·한양에 대해 '돈(錢)을 세 번씩 던져(擲)' 앞뒤 길흉의 숫자로 점을 치기로 합의를 봤다.

10월6일 몇 명의 신하와 함께 종묘에 들어가 척전(擲錢) 의식을 행했는데 결과는 한양이 2길1흉, 개성과 무악이 2흉1길로 한양천도가 결정됐다. 요즘 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무악을 주장했던 신하들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나는 무악에 수도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후세에 반드시 누군가가 수도를 정할 자가 있을 것이다"란 립서비스를 날리고는 곧바로 한양 천도와 이궁(창덕궁)의 건설을 명했다.

옛날에도 그랬겠지만 평등사회인 현대는 정치든 직장이든 아니면 가정생활이든 서로 다른 생각이 수없이 부딪치는 현장을 수없이 목도하고 경험한다. 어느 견해가 옳은지 수없이 토론하고 의견을 개진하는 과정을 밟지만 결론을 내기는 쉽지 않으며 혼란을 더 부추길 가능성도 있다. 그때 주도권을 쥔 쪽에게 필요한 것이, 시간이 걸리더라도 절차를 거쳐 상대방이 묵인하며 넘어갈 수 있게 하는 명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양 재천도 과정에서 태종이 보여준 태도의 변화는 한 번쯤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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