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는 현재 디지털헬스케어 스타트업 7개팀과 함께 미국 실리콘밸리에 머물고 있다. 서울바이오허브의 지원으로 미국진출을 희망하는 유망한 디지털헬스케어 스타트업과 실리콘밸리에서 2주 간의 부트캠프를 진행 중이다. 스타트업들과 숙식을 함께하며 실리콘밸리 현지의 선배 창업자, 벤처캐피탈, 의료기관 등을 만나 미국에서 사업 및 투자유치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이렇게 공식·비공식적인 미팅과 네트워킹, 피칭 등을 거듭할수록 창업자들의 미국진출 의욕은 더욱 불타오른다. 단순히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미국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싶어하는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필자가 체감한 큰 변화는 한국 창업자 중에서 소위 '플립', 즉 한국법인을 미국법인으로 전환하는 것을 고려하거나 아예 처음부터 미국에 법인을 설립하는 경우가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서류상 법인만 미국에 두고 실제 운영은 한국에서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팀 전체가 미국으로 이민하는 '진짜 진출'이 증가했다.
특히 초기 팀일수록 외부에서 투자유치를 진행한 경우가 드물어 세금이슈가 적기 때문에 플립을 더욱 적극적으로 고려한다. 더구나 주변 또래 창업자들이 미국으로 넘어가는 사례가 늘면서 '우리도 할 수 있다'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하는 분위기다. 게다가 요즘 젊은 창업자의 상당수가 어린 시절 해외경험이 있어 언어적·문화적 장벽이 낮은 것도 큰 요인이다.
이들이 해외로 나가려는 이유는 단순하다. 더 큰 기회와 시장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노력을 하더라도 더 많은 자금을 투자받을 수 있고 더 크게 성장할 여지가 있는 큰 시장에서 도전하고 싶은 것이다. 창업자라면 누구나 꾸는 꿈이지만 이제는 이를 실행에 옮기는 이가 실제로 늘고 있다.
이번에 방문한 한 실리콘밸리의 '해커하우스'(초기 창업자들이 숙식을 함께하며 사업개발에 집중하는 공간)엔 2층 침대에 모여 자면서 라면을 끓여 먹으며 미국 시장에 도전하는 열정적인 한인 창업자가 가득했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하루라도 빨리 더 큰 시장으로 나오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글로벌로 진출할 스타트업이 굳이 한국 투자사로부터 투자를 받을 유인이 줄어든다는 뼈아픈 지적도 있었다. 실제로 그들 중엔 한국이 아닌 미국 벤처캐피탈에서 시드투자를 받은 곳도 여럿 있었다. 심지어 이런 미국 벤처캐피탈들은 창업자들의 미국 진출을 돕기 위해 비자발급 요건까지 지원했다.
우수한 창업팀들이 글로벌 시장에 도전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고 권장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벤처투자를 하는 입장에서는 아쉬움과 고민이 교차한다. 유망한 한국 창업자들이 미국에서 창업하고 플립을 하는 상황에서 현재의 벤처투자조합 및 개인투자조합 규정으로는 이들에게 자금을 충분히 투자하고 성공의 과실을 나누기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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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소벤처기업부 산하 벤처투자조합 및 개인투자조합에는 '의무투자비율'이 있어 국내 기업에 상당비율 이상을 의무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투자를 검토하는 매력적인 팀의 상당수는 이미 미국법인이다. 한국의 인재가 한국의 기술로 만든 회사지만 법인이 미국에 있다는 이유로 한국 펀드가 투자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이러한 한국계 스타트업이 성공했을 때 그 과실을 한국자본이 아닌 해외자본이 독식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중기부나 모태펀드 차원에서도 진지하게 고민해볼 문제다. 한국의 우수한 인재들은 더 큰 기회를 찾아 계속 해외로 떠날 것이다. 이러한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한국 펀드들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현재의 투자조합 운용원칙에 유연한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기회를 잡기 위해 결국 한국의 펀드들도 해외로 떠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