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 디지털자산 입법 지연의 대가

[MT시평] 디지털자산 입법 지연의 대가

정구태 인피닛블록 대표이사
2026.04.21 08:11

미국의 클래리티 법안과 한국의 디지털자산 당정협의안이 최근 나란히 교착 국면에 들어선 장면은 낯설지 않다. 새로운 산업이 제도권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반복돼 온 갈등, 곧 기존 기득권과 신생 사업자 사이의 힘겨루기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미국에서는 스테이블코인 이자지급 허용 여부가, 한국에서는 거래소 지분 분산과 은행 중심 발행 구조가 주요 쟁점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 사안들을 들여다보면, 시장 전체를 위한 보편적 규범이라기보다 일부 대형은행과 대형거래소의 이해관계와 더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제도는 산업 생태계 전체의 성장 경로를 열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논의는 오히려 특정 이해관계가 입법의 방향과 속도를 좌우하는 모습에 가깝다.

디지털자산 산업 초기에 필요한 규제는 기득권을 지키는 장벽이 아니라 시장의 최소 질서를 세우는 공정한 규칙이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는 식의 진입 차별이 아니다. 명확한 산업 정의, 시장 기본질서 확립, 사업자 규율 등과 같이 모든 시장 참여자에게 보편 타당하고 일관되게 적용되는 원칙이 우선돼야 한다. 그래야 시장은 예측 가능성을 확보하고, 사업자는 같은 기준 아래에서 경쟁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처럼 일부 대형 사업자에게만 의미가 큰 이슈가 법안 전체를 붙잡아 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방식으로 입법이 지연되면 결국 가장 큰 비용은 산업 전체와 투자자에게 돌아간다. 법이 없거나 늦어질수록 시장의 불명확성은 커지고, 불명확성은 다시 불투명성과 불공정성으로 이어진다. 기준이 모호하면 성실한 사업자는 위축되고, 회색지대를 활용하는 사업자만 상대적으로 유리해진다.

이제 디지털자산업은 미국과 한국 모두에게 산업정책이자 금융안보 전략의 성격을 함께 띤다. 글로벌 자본과 인재, 인프라는 규제가 없는 곳이 아니라 규칙이 분명한 곳으로 이동한다. 입법 지연이 길어질수록 시장은 관망하게 되고, 혁신기업은 해외로 눈을 돌리며, 국내 투자자는 더 불리한 환경에 놓이게 된다.

특히 한국이 거래소 지분 분산이나 은행 과점형 발행 구조처럼 국제적으로도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규제를 앞세우다가 입법 타이밍까지 놓친다면, 이는 투자자 보호는 물론 산업 경쟁력도 약화시키는 이중 실책이 될 수 있다. 제도는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국제 경쟁의 흐름과 정합성을 가져야 한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구조를 핵심 전제로 삼아 입법을 지연시키는 접근은 신중함이라기보다 정책적 기회비용을 키우는 선택에 가깝다.

지금 필요한 것은 완벽을 명분으로 입법을 늦추는 태도가 아니다. 우선 합의 가능한 원칙부터 제도화하고,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사안은 단계적으로 보완하는 현실적 접근이 필요하다. 제도화의 출발점은 기득권 수호가 아니라 시장 신뢰 회복이어야 하며, 더불어 투자자 보호와 국익이 최우선 이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누구의 몫을 얼마나 지켜줄지에 대한 계산이 아니다. 불확실성을 걷어내고 공정한 운동장을 만드는 결단이다. 입법이 늦어질수록 그 대가는 개별 사업자가 아니라 시장 전체, 나아가 국가 경쟁력의 손실로 돌아오게 된다.

정구태 인피닛블록 대표이사
정구태 인피닛블록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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