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연금이 증시 급락 국면에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지난 주 AI 투자 우려로 기술주 투매가 쏟아지면서 코스피지수는 14.46% 내린 5668.05로 마감했다. 급락장에서 국민연금이 주가 폭락을 막아주는 '안전판' 역할을 제대로 못하자 증시는 속절없이 무너졌고 국민연금의 손실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국민연금은 지난 1월 리밸런싱을 유예했고 5월에는 국내주식 비중을 14.9%에서 20.8%로 상향조정했다. 전략적 허용범위까지 포함하면 국내주식을 최대 28.8%까지 보유할 수 있게 함으로써 코스피 상승으로 인한 리밸런싱 부담을 없앴다. 6·3지방선거를 앞두고 코스피지수가 8800선까지 급등했을 때 보유 비중을 조금씩 줄여야 하는데, 증시부양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정청래 전 민주당 대표가 "주식계좌를 보면서 마음이 흐뭇하신 분이 있다면 민주당에 투표해달라"고 한 발언에서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급등기에 국내 주식 비중을 줄이지 못한 결과는 막대한 손실로 돌아왔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지난 15일 기준 국민연금이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상장사 287곳의 주식 평가 총액은 333조5330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 6월말과 비교하면 불과 석 달 반 만에 182조3699억원(35.3%)이 증발했다. 게다가 국민연금이 외국인 현금자동입출금기(ATM)기 역할을 하자 외국인만 수익을 고스란히 챙겨 한국 증시를 떠났고 고점에 물량을 떠안은 개인투자자는 큰 손실을 봤다. 더 큰 문제는 지금이다. 상승기에 리밸런싱을 미룬 국민연금은 매수 여력이 바닥나 정작 급락기에 해야 할 안전판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비중은 24.9%로 목표치를 넘어 더 늘릴 여력이 없다.
국민의 노후자금을 책임지는 국민연금은 운용원칙에 따라서 독립적으로 운용되어야 하며 증시 부양 수단으로 동원돼서는 안 된다. 투명성도 마찬가지다. 이번처럼 기금운용위원회 회의록을 2030년까지 비공개하기로 한 것은 스스로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다. 또한 정부 차관 등 당연직 위원 비중이 높아 증시부양 등 정책 목표가 운용판단에 앞설 수 밖에 없는 기금위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정책 목표를 앞세우느라 국민연금 수익을 뒷전에 두는 것은 가입자들의 몫을 빼앗는 일이나 다를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