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300]"특권경제에서 공정경제로 대전환"…DJ 유세 인용·안철수 포용

'정치'를 지웠다. 그 자리에 '경제'를 써넣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9일 소득주도성장을 통해 공정한 경제 생태계를 이루겠다는 새경제(new economy)를 제시했다.
이날 국회 교섭단체대표연설 데뷔전을 치른 문 대표는 새정치연합 내부조차 놀랄 만큼 연설 대부분을 경제 문제에 할애했다. 참모들이 보고한 초안에서 정치분야를 과감히 지우고 경제 비중을 확 높였다. 연설문 시작부터 끝까지 DJ(고 김대중 전 대통령)를 언급했다. 야당 정통성과 경제역량을 동시에 강조한 것이다.
이를 통해 전날 과감한 '진보적 보수' 발언을 쏟아낸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중원 공략에 맞섰다. 노동·세제·사회개혁 등 각 분야 구체적 정책과제에다 안보와 남북경협 방향까지 제시했다. "우리가 여당보다 잘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근혜정부에 대해 "서민경제 파탄과 국민 분열의 연속이었다"며 "국민 입장에선 배신당한 2년"이라고 혹평했다.
◇'44년 전 DJ' 불러낸 文..다목적 포석
하루 전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같은 자리에서 '노무현'을 언급했다. 문 대표가 이에 화답하듯 박정희 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재평가하는 '파격'은 없었다. 그대신 김대중으로 시작해 김대중으로 끝난 것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첫머리부터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1971년 장충단 공원 대선 유세를 인용했다. 야권에선 '전설'로 통하는 명연설이다. 문 대표는 "특정재벌과 결탁해 합법 면제해 준 세금만 1200억"이란 DJ 연설로 자신의 경제진단을 대신했다. 대기업을 강자로, 중소기업과 골목상권은 약자로 보고 현 경제상황을 '특권경제'로 규정했다.
이어 "대기업에만 의존하는 경제로는 지식기반 정보화 시대의 세계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며 "국내에도 대기업 등 강자는 승승장구하고 중소기업과 골목상권은 피폐하는 지금의 경제구조로는 대한미국의 미래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연설 마지막도 장충단공원 DJ 연설의 "특권경제를 끝내야 합니다"고 맺었다.
2017년 대선을 내다보는 문 대표로선 일찌감치 경제분야에 준비된 대통령임을 내세웠던 DJ 이미지를 자신에게 오버랩시킨 것이다. 동시에 동교동계와 마찰로 상징되는 최근 당 내부갈등을 불식시키려는 포석이다. 교섭단체 연설치곤 이례적으로 대형화면에 슬라이드를 띄웠는데 그 장면이 71년 유세중인 DJ의 흑백사진이었다. 이른바 '마이크로 타깃팅' 관점에선 "전국민과 동시에 호남을 집중 겨냥한 연설"이란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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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경제' 강조 "철학도 방법도 다 바꿔야"
새경제(신경제)는 '사람중심경제'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소득주도 성장이란 방법론을 갖췄다. 새로운 경제 생태계는 공정한 조세와 공정한 경쟁의 룰이 갖춰진 '공정경제'로 표현했다. 이는 같은 당 대선 경쟁자 격인 안철수 의원의 공정성장론을 끌어안은 것이다. 문 대표는 지난 7일 당 정책엑스포의 안 의원 발표에 직접 참석, 메모까지 하며 경청했다. 기자들에겐 "교섭단체 대표연설에 커닝 좀 하겠다"고 말했다.

문 대표의 고민은 경제 패러다임을 바꾸기 쉽지 않다는 데 있었다. 루즈벨트 전 미국 대통령이 대공황기인 1932년 경제정책 기조를 바꾸기 위해 '성전'이란 표현까지 쓴 점을 인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구체적 정책에선 '상식'을 깨는 데 주력했다. 문 대표는 "비정규직 고용은 경제에는 마약같은 것"이라며 "고용을 안정시키고 일자리의 질을 높여 가계소득을 높이는 쪽으로 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비정규직의 고용은 당장은 기업의 비용을 줄일지 모르지만 세계경쟁에서 노동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노동시장 양극화가 사회통합을 가로막는 이유는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과 열악한 처우 때문이지, 정규직의 탓이 아니다"고 꼬집었다.
그는 "진단이 잘못됐으니 처방도 틀렸다"며 대안으로 시간당임금·초과근무수당 등에서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하고 안전관련 업무와 상시·지속업무는 정규직으로 전환하되 이를 공공부문이 선도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최저임금이 일정수준에 오르기까지는 두자리수 (인상률로) 인상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당이 유능한 경제정당이 돼 국민의 지갑을 지키고 두툼하게 채우겠다"고 말했다.
민병두 민주정책연구원장은 "보수가 생각하는 경제 방법론은 (수명이) 끝났으니 경제철학, 방법론, 생태계를 다 흔들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문 대표는 "과거 박정희 정부가 토목인프라, 김대중 정부가 IT인프라를 구축해 기업과 국민들의 비용을 낮춰준 것처럼 이제는 국가가 ‘생활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다.
문 대표는 "주거, 교육, 보육, 의료, 통신 등 필수생활비 부담을 줄이고 생활소득을 높여야 한다"며 전월세상한제, 계약갱신청구권, 통신비인하 등으로 중산층과 서민의 가처분소득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가계부채와 전월세대책 관련 국회 내 협의기구 구성도 여당에 제안했다.
문 대표는 '경제전문가'는 아니다. 하지만 2012년 대선 자신의 공약인 소득주도성장론에 안철수 의원의 '공정성장론'을 끌어안는 등 업그레이드를 우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문 대표 측근은 "야당에 그동안 방법론만 있고 전체적인 '경제지도'가 없었다면 경제 생태계와 철학까지 망라한 지도를 처음 제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가깝게는 4월 임시국회부터 멀게는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까지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여야 정책승부가 치열하게 펼쳐질 전망이다. 문 대표 연설문에 깊이 참여한 홍종학 의원(정책위수석부의장)은 "법인세 인상논의의 결실을 맺길 기대한다"며 "유승민 원내대표 발언이 선거 끝나면 거둬들이는 멘트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발언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배신당한 2년…안보도 우리가 잘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정치 현안이나 사회 분야에 대한 언급은 적었다. 4대강 사업, 자원외교, 방위산업비리 등 이른바 '사자방'에 대해 "국정조사를 통해 ‘사자방’ 비리를 반드시 밝혀내 책임 있는 사람들을 처벌하고 손해배상도 받아내야 한다"며 "새누리당이 할 일은 방패막이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안보 분야에서는 "야당이 새누리당 정권보다 잘 할 수 있다"며 10·4 남북정상선언의 '서해평화협력 특별지대' 실현을 촉구했다. 5.24 조치에 대해선 "전면 해제가 어렵다면 유연한 적용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전날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북핵과 사드 문제 등에 대한 야당의 입장을 요구한 데에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유승민 원내대표가 '합의의 정치'를 강조한 데 화답하는 모양새는 취했다. 문 대표는 대기업 사회적 책임, 공무원연금 개혁 등 경제주체들의 이해조정 관련 정부가 적극 중재한다면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그런 차원에서 어제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의 연설을 의미있게 들었다"고 덧붙였다. 유 원내대표 발언에 대한 평가는 이날 사전 배포한 원고에 없는 내용이다.
이밖에 세월호 인양에 대해 "비용을 따질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인양해야 한다"며 "세월호를 인양해 팽목항이나 안산에 두고 안전한 대한민국의 상징과 교훈으로 삼는다면 비용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