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긴급조치 9호 선포


1972년 10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정지 등을 골자로 하는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한다. 발표와 함께 '유신헌법'이란 새 헌법이 만들어진다.
유신헌법 제53조엔 '긴급조치권'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대통령이 긴급조치를 발동하면 '헌법상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었다. 역대 대한민국 헌법 가운데 대통령에게 가장 강력한 권한을 위임했던 긴급권이었다.
1975년 4월 크메르 공화국(현 캄보디아에 있었던 국가)이 캄푸치아 공산 게릴라에 항복하고 이어 월남마저 공산화되자 안보 위기의식이 퍼졌다. 이에 편승해 박 대통령은 41년 전 오늘(1975년 5월13일) 총력안보와 국민총화를 굳힌다는 명목 하에 9번째 긴급조치를 선포한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긴 어두운 터널에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긴급조치 9호는 △개헌논의 금지 △집회시위 금지 △유언비어 날조유포 금지 △긴급조치에 대한 비방 금지 등을 골자로 했다. 이전에 발동했던 긴급조치 1호~7호까지의 내용을 거의 포괄하는 '긴급조치 종합판'이었다.
긴급조치 9호가 시행되면서 한국사회는 전시 상태와 다름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반정부활동을 언론이 보도하거나 전파하는 일까지 금지했고 위반자에 대해선 영장 없이 체포·구금할 수 있게 했다. 이 조치를 비방하는 사람에게도 역시 1년 이상의 징역형에 10년 이상의 자격정지가 부과됐다.
이전까지의 긴급조치와는 사뭇 달랐다. 긴급조치 8호까진 반정부활동을 한 사람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지만 긴급조치 9호는 일반 재판에 회부하도록 했다. 사형과 무기징역 등이 내려지던 형량도 1년 이상의 형량으로 낮춰졌다.
언뜻 처벌 완화로 보일수 있지만 형량을 현실화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을 감시하고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정치적 억압이 일상화된 것. 긴급조치9호 발동 후 기세에 눌려 반정부운동이 침묵에 빠졌다. 대학 캠퍼스엔 학생들을 감시하기 위해 경찰이 들어왔고, 학생회는 줄줄이 해체됐다.
결국 긴급조치9호는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같은 해 12월8일 0시를 기해 해제됐다. 5년7개월만이었다. 긴급조치 9호가 시행되던 기간 1020명이 연루됐고 이 가운데 530명이 구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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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긴급조치 9호는 2013년 헌법재판소에 의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현행 헌법에 어긋났다"며 위헌으로 결정된다.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자 민주주의가 눈 앞에 온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긴급조치 9호 해제 나흘 뒤 신군부의 군사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다시 멀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