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5·16 군사정변… 박정희 소장 일파 쿠데타 일으켜 정권 탈취


1960년4·19 혁명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한 후, 민주당이 주도한 국회는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헌법을 개정했다. 이 헌법에 따라 같은 해 7월 총선거가 실시돼 민주당의 장면 내각이 들어섰다.
하지만 민주당 정권은 장면의 민주당 신파와 윤보선의 민주당 구파 사이의 정치적 갈등으로 정치적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4·19 혁명 이후 분출되는 사회 각계 각층의 요구마저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여기에 이승만 자유당 정권 청산에도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각 계층들이 서로의 의견을 내며 논쟁과 갈등이 이어졌지만, 이전 정권에선 상상할 수도 없던 모습이었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씨앗이 싹트던 상황에서 장면 정권은 군사반란의 조짐을 수차례 보고받는다. 하지만 장면 총리는 주한미군에 기댄 안이한 판단으로 정보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결국 정부의 정치력 부재와 사회·경제적 혼란, 군 내부 인사에 불만을 품던 군 장교 일부는 정권을 탈취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55년 전 오늘(1961년 5월 16일) 당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김종필 예비역 중령 등을 비롯한 육군사관학교 8기·9기 출신 일부 장교들이 군을 이끌고 수도 서울로 향한 것이다.
이날 오전 3시, 이들이 이끄는 해병 제1여단 소속 1000여명을 포함해 서울 주변에 주둔하던 3600여명의 병력이 서울 시내로 진입했다. 이들은 제1한강교 북쪽에서 헌병대 50여명의 저항을 물리치고 2시간 만에 청와대, 정부청사, 방송국, 신문사 등을 장악했다. 순식간에 소규모 병력에 국가의 심장부를 뺏긴 것이다.
정변 발생 후 당시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은 쿠데타 세력과 한 패가 됐고, 장면 총리는 수녀원으로 피신한다. 당시 윤보선 대통령은 '자기에게는 군통수권이 없다'며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와 주한 미국 대리대사가 요청한 쿠데타 저지 목적의 병력동원 허가를 거부해 군사반란을 사실상 방조한다.
이어 △미국 정부의 신속한 지지표명 △장면 내각의 총사퇴 △윤보선의 묵인 등에 의해 쿠데타는 성공하게 되고, 제2공화국은 무너지게 된다. 이날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조만간 원대복귀 하겠다던 혁명공약 제6조를 번복하고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윤보선을 물리치고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