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
세상을 보는 새로운 창이 열립니다. 음악과 문화, 책이야기 등 부드러운 이야기로 세상을 들여다 봅니다.
총 1,275 건
1990년대가 끝나갈 즈음이었다. 전공의 생활이 고달프던 때 잠시나마 여유를 누리려 비디오 대여점에 들렀다가 주인이 권하는 영화 한 편을 빌려 보았다. 제목이 '가타카'여서 일본 영화인가 싶었다. 나중에야 'GATTACA'가 DNA를 이루는 네 가지 염기의 머리글자 A, T, G, C를 암시함을 알았다. 큰 기대 없이 본 영화였지만 한동안 나를 먹먹하게 했고,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영화는 유전자로 사람의 자격을 정하는 미래를 그린다. 우수한 유전자로 판정된 사람에게는 원하는 직업과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허락되는 삶은 가혹하다. 주인공 빈센트는 후자였다. 열악한 유전자를 가졌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살아 보기도 전에 삶의 한계부터 정해져 버린 셈이다. 그런데도 그는 가장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만 도전할 수 있는 우주비행사를 꿈꾼다. 결국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한 남자의 우수한 유전자 신분을 빌려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위험한 세계로 들어가고 만다.
기억을 더듬고 기사도 찾아보니 2005년 11월 초순경이었던 것 같다. 파리 교외 소도시에서 시작된 소요사태가 파리 중심부까지 확산된 시점이었다. 당시 파리특파원으로 일했던 필자는 시위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평소 사람이 많이 모이는 앵발리드 광장을 찾았다.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는 군사 박물관이 바로 옆에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2024년 파리올림픽 때 양궁경기가 진행됐던 바로 그 광장이기도 하다. 소요 사태 와중에도 여유롭게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평소와 다름없게 느껴졌다. 그런 상황을 수첩에 메모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청년이 필자의 손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순간 주변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면서 십여명의 청년들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뜻 모를 짧은 외침과 함께 대여섯명의 점프 차림 남자들이 필자 10여 미터 앞에 일자로 서서 전방을 경계했고, 그 바로 뒤에서 또 대여섯명의 점프 차림 남자들이 두세명의 청년을 붙잡아 제압하려 했다. 그때 알았다.
이달 찾은 실리콘밸리에서 처음 나를 놀라게 한 건 운전석이 빈 웨이모의 로보택시였다. 샌프란시스코의 교통체증과 서로 밀고 들어오는 사거리의 차들 앞에서 웨이모는 다소 움츠러들었고 15분 거리를 한 시간이나 걸려 도착했다. 그런데 그 한 시간 동안 누구도 운전대를 잡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운전대에 손을 대지 않아도 스스로 달리는 테슬라의 FSD(Full Self-Driving)도 마찬가지였다. 도로 위 풍경은 미래 그 자체였다. 그러나 정작 더 의외였던 것은 샌프란시스코와 산타클라라를 잇는 101번 고속도로의 입간판이었다. 경부고속도로의 입간판이 세계로 뻗어 가는 라면 같은 K-푸드 광고로 채워져 있다면 이곳의 입간판은 큼지막한 글씨로 '추론(inference)'을 외치고 있었다. 이미 만들어진 AI를 돌리는 일, 곧 추론과 그 인프라의 광고였다. 행사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는 지금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뜨거운 단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실리콘밸리는 미래 기술의 발원지다. 이곳의 발표는 세상을 놀라게 하고 그 놀라움은 이내 산업이 되어 세계로 흘러간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는 걸어서 열린 길로 나선다. / 건강하고 자유로운 몸, 내 앞에는 세계가 펼쳐져 있다. / 내 앞에 길게 뻗은 갈색 길은 내가 선택하는 어디로든 이어진다. "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1819~1892)의 '열린 길의 노래' 도입부다. 한국 시인이 이렇게 썼다면 어용시인이나 국뽕시인이라고 욕먹었을 게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어 …" 정수라가 '아!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노래하자 관제 애국가요라는 비아냥이 나왔지만, 휘트먼은 '국민 시인'이 됐다. 반면 흑인 시인 랭스턴 휴스(1902~1967)는 '미국이 다시 미국이 되게 하라'에서 "탐욕을 위해 모든 것을 소유한 자들" 때문에 농부, 노동자, 흑인("너희 모두의 종"), 가난한 백인, 인디언("땅에서 쫓겨난 붉은 남자")에게 미국의 꿈은 애초부터 허락되지 않았다고 항의했다. 두 시인은 미국의 빛과 그림자를 그려냈지만, 개인의 자유와 대중의 연대가 민주주의 안에서 실현되기를 꿈꾸었다는 점은 한결같았다.
결혼은 오래된 집과 같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드나들며, 방을 만들고 문을 바꿨다. 과거에는 가문이나 종교가 주인 노릇을 하기도 했지만, 오늘날 그 열쇠는 온전히 두 사람 손에 쥐어져 있다. 그런데 집주인은 바뀌었지만 내부 구조는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이다. 밖에서 함께 일하고 돌아와도 한 사람은 쉬고, 다른 한 사람은 집안일과 돌봄이라는 두 번째 출근을 해야 한다면, 이 집은 과연 제 기능을 다 하고 있는 것일까? 결혼은 시대의 거울이다. 기원전 함무라비 법전의 지참금 규정부터 고려시대의 균등상속, 조선시대 유교적 가부장제를 거쳐 근대의 연애혼에 이르기까지, 결혼은 삶과 재산, 세대 간 지위를 정하는 사회적 장치로 진화해 왔다. 그러나 이제 결혼은 도덕적 당위나 관습이 아닌 '합리적 선택'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인구총조사에 따르면 40~44세 미혼 비율은 2000년 남성 4. 9%, 여성 2. 6%에서 2020년 남성 27. 2%, 여성 14. 7%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자신의 미래와 꿈을 가진 현대인에게 결혼은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약속할 때 비로소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되었다.
아프리카 사바나의 건기가 깊어지면 동물들은 물이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웅덩이로 모여든다. 영어로 워터링홀(Watering Hole)이라 부르는 곳이다. 물을 찾아온 코끼리와 얼룩말, 영양이 좁은 웅덩이를 함께 차지한다. 이곳은 생명을 이어 주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위험이 집중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물이 마르거나 포식자가 나타나면 그 충격은 한곳에 모인 동물들에게 한꺼번에 닥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경제에도 워터링홀이 있다. 바로 반도체 산업이다. 세계적인 AI 투자 확대에 힘입어 반도체 수출이 빠르게 증가하면서 경상수지 흑자가 확대되고 기업실적도 개선되고 있다. 최근 발표된 국제통화기금의 세계경제전망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은 올해 2%대를 회복하고 내년에도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워터링홀은 물이 귀할수록 그 가치가 커진다. 이 점에서 최근 반도체 산업의 성장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인구구조 변화와 생산성 둔화로 잠재성장률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가운데, 한국 경제에서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기 어렵다는 우려가 깊어져 왔다.
제목에서 제시한 질문에 대한 인공지능 구글 제미나이의 답변은 이렇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역할이 밀려나는 듯한 현상은 역사의 반복이지만, 인공지능(AI)이 가져오는 소외는 과거의 기계화와는 결이 다른 층위의 질문을 던집니다. 산업혁명이 인간의 육체노동을 기계로 대체하며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를 낳았다면, 지능형 시스템은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 여겼던 인지, 판단, 창작의 영역에 개입하면서 보다 근본적인 소외감을 만듭니다. " 그리고 그 소외의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노동과 효용에서의 소외(기능적 대체), 주체적 사유와 판단의 소외(인지적 외주화), 관계와 감정의 소외(유사 인격과의 대체). " 인간이 저 세 가지로부터 소외될 때 이 사회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얼마 전 오픈AI의 비공개 인공지능 1만 개가 백 년 수학 난제 300건 이상을 해결했다고 한다. 수(數)를 구도적 영역으로까지 여기며 깊은 추론을 이어가던 수학자들은 큰 충격과 더불어 우려를 표했다. "그것은 수학을 추구하는 목적에 위배된다"며 그간 수학자들이 추구해 왔던 이상과는 배치되는 과정과 결과에 당황스러운 상황인 듯하다.
'악마는 결코 잠들지 않는다'는 오래된 말이 있다. 시기나 왜곡된 원한에 사로잡힌 자들이 타인을 괴롭히기 위해 쏟아붓는 기이한 열정을 꼬집는 말이다. 그런데 몇 번의 명령어만으로 거짓을 짜맞추고 의혹을 부풀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흠집내기를 위한 논리를 만들고 그럴듯한 문서를 생산하는 AI 덕분에, 악의는 이제 예전만큼 성실하지 않아도 작동한다. 최근 값비싼 변호사 선임 비용 때문에 사법적 구제를 포기했던 소시민들이 생성형 AI(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직접 소장을 작성하고 '나홀로 소송'에 나선다는 뉴스를 보았다. 전문적인 법률 지식 없이도 소장을 쓰고, 복잡한 행정 절차를 처리해 나갈 수 있다니, 거대한 자본이나 조직의 위계로부터 독립적인 개인의 창의성이 해방될 수 있는 도구로 PC와 뉴미디어 기술을 환영하던 지난 세기의 희망이 어느 정도 실현된 듯 보인다. 기술이 개인의 발언과 권리 행사의 문턱을 낮추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사실관계검증의 부족뿐 아니라 객관성을 잃은 AI 환각이 공적 영역에 침투해 행정력 낭비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는 간과할 수 없다.
이소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페이스북에 올린 스마트공장 현장 방문기를 읽었다. 삼성전자가 중소기업에 제조혁신 노하우를 전수하는 모습을 보며, 숙련된 정규직 직원들이 오랜 시간 현장에 머물면서 공정을 개선하는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진심이 느껴졌다. 필자는 이 글을 읽으며 중기부 장관으로 일하던 시절 추진했던 '자상한 기업(자발적 상생기업)' 프로젝트를 떠올렸다. 대기업이 가진 기술과 경험·인프라를 중소기업과 나누고 이를 통해 함께 성장하는 생태계를 만들자는 취지였다. 당시 우리가 주목한 건 단순히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돈을 지원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대기업이 축적한 기술과 노하우를 중소기업의 현장에 이식해 실질적인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었다. 삼성전자와 함께 추진한 대·중소 상생형 스마트공장 사업 '자상한 기업' 시리즈도 이러한 철학의 연장선에 있었다. 특히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마스크 공급이 사회적 과제가 되었을 때 스마트공장의 가치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생산설비와 공정을 개선하고 생산 효율을 높이는 작업은 마스크 생산 확대와 공급 부족 사태를 완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나의 학습 노트 위에 /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 모래 위에 눈 위에 /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 (제2~20연 생략) //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 자유여. "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1895~1952)의 시 '자유'의 앞뒤 부분이다. 그는 약 70개 사물과 아미지 위에 20번이나 "너의 이름"을 쓴다. 쉼표와 마침표도 없이 84행까지 이름을 숨긴다. 독자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 마지막 제85행에서 이름이 나온다. 시인은 원래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을 부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유"를 호명했다. 그게 신의 한 수였다. 세상 만물을 자유의 영토로 귀속시킨 대하 드라마가 된 것이다. 영국 공군은 나치 치하의 프랑스 상공에서 이 시를 무기와 의약품 등과 함께 낙하산으로 떨어뜨렸다. '자유'는 사랑에서 출발해 민족해방을 넘어 인류의 열망을 담은 작품으로 등극했다. 최근 프랑스 '고딩'들이 공부하고 싶다면서 '시가전'을 벌이는 소요사태는 인류 최초의 일이 아닐까? 학생들에게 학교는 억압이고, '농땡이'야말로 자유일텐데 왜? 이 시를 다시 펼쳐보다 뒤늦은 발견을 하게 됐다.
얼마 전 모르는 외국인으로부터 영문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호주 소재 은행의 인사담당자라고 밝히면서, 해외 자산운용사가 한국에 자산운용사 설립을 검토 중이니 관심 있으면 메일에 적힌 주소로 "급하게" 연락을 달라고 했다.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비즈니스 네트워크 사이트인 링크드인(LinkedIn)을 통해 내 연락처를 파악했나 추측하면서도, 호주 은행의 모르는 인사담당자가 직접 연락해 왔다는 사실이 왠지 석연치 않았다. 그래서 평소 자주 사용하는 인공지능(AI) 서비스 몇 곳에 진위 검증을 의뢰했다. 그 결과, 해당 은행은 실재하지만 인사담당자의 계정이 정교하게 도용된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산업은행 30년 경력의 나조차 순간적으로 헷갈릴 만큼 인터넷 사기 수법이 정교해지고 있다. 이처럼 그럴듯한 접근이 일상화한다면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지 않거나 인지기능이 저하된 이들은 어떻게 자기 재산을 지킬 수 있을까. 최근 국내 여러 금융회사에서 정보유출 사고가 잇따랐다. 핵심 금융망보다는 직원과 대출모집인 등이 이용하는 외부 업무시스템이 취약한 유출 고리로 지목됐다.
혁신 기술을 개발한 스타트업이 시장에서 부딪히는 장벽은 첫 고객을 확보하는 일이다. 제품을 소개하면 성능을 입증할 실적을 요구하고, 실적을 쌓으려면 누군가 먼저 구매해야 한다. 연구개발 지원을 받아 기술을 완성하고도 첫 고객을 만나지 못해 사업화 문턱에서 멈춰서곤 한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창업정책은 기업을 만들고 기술을 개발하도록 돕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 올해 정부와 지자체의 창업지원사업은 무려 508개, 예산은 약 3조5천억원에 이른다. 창업자금, 연구개발, 사업화 등 다양한 지원은 필요하다. 그러나 지원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과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스타트업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고객과 매출이다. 정부는 지원기관인 동시에 거대한 구매자다. 지난해 우리나라 공공조달 규모는 238조 5000억원에 달했다. 정부는 혁신기술의 초기시장 형성을 위해 2019년 혁신조달 제도를 도입했지만, 지난해 혁신제품 구매액은 1조 1000억원에 그쳤다. 전체 공공조달의 0. 46%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