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여성이 행복한 나라'…공염불 아니길

[기자수첩]'여성이 행복한 나라'…공염불 아니길

성세희 기자
2013.03.06 06:28

 곡기를 끊은 지 아흐레째. 길에 나온 지 어느덧 보름을 넘겼다. 새 학기라 한창 바쁠 선생님이 거리에서 풍찬노숙을 감행했다. 5일 종로구 신문로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16일째 찬바람을 맞은 송정순씨(44) 볼은 까칠하고 붉었다.

 송씨는 우리나라 최초 여성 대통령이 취임한 날부터 단식에 돌입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이 공공부문과 여성 비정규직 해결하겠다고 공약을 내세웠다. 정부 공공부문과 학교 비정규직노동자 가운데 여성이 99%에 육박하는데 대책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학교에는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 외에도 아이를 돌보는 수많은 손이 있다. 점심시간마다 밥을 챙겨주는 급식 조리사를 비롯해 책을 골라주고 추천하는 도서관 사서가 학교 안에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이뤄진 '수많은 손'은 한해마다 바뀐다.

 송씨는 지난해 서울 역삼중학교에서 1년간 과학보조 선생님으로 재직했다. 송씨같은 비정규직 교사는 해마다 해고통지를 받는다.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연례행사. 전국 학교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는 선생님은 올해 1만명이 넘는다. 이들이 2년 단위로 계약하면 무기계약으로 바뀌지만 교장과 문용린 서울시 교육감 등 모두 외면한다.

 5년간 노숙생활을 버티다 30미터 고공까지 올라간 여성도 있다. 종로구 명륜동 혜화동 성당 종탑 위를 오른 오수영씨(39)와 여민희씨(41). 특수고용노동자 신분이란 이유로 일방적 해고 통지를 받은 두 사람은 절박한 심정으로 종탑에 올랐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실마리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여성이 행복한 나라'를 바라는 수많은 마음이 모여 박 대통령을 만들었다. 지난 정부의 '과오'를 풀고 새로운 세상을 원하는 이들에게 박 대통령은 희망이 될까. 종탑에 올라선 오씨는 "박 대통령 공약인 '여성이 행복한 나라'는 두루뭉술하다. 여성이 사측으로부터 보호받을 사회적 안전장치가 부실하다"는 촌평을 날렸다.

 길거리로 나온 절박함이 대통령에겐 닿지 않아 보인다. 험한 세상에 여성이 노숙하기엔 위태롭다. 벼랑 끝에 몰린 여성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농성한다는 이유로 수많은 위협에 시달린다. 극한 대립 끝에 폭력과 성추행을 당해도 공권력은 여성 편이 아니다. 공권력은 부끄러움을 잊은 지 오래다.

 대통령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 비정규직 여성을 비롯한 약자가 겪는 폭력에 둔감하다. 오랜 세월을 싸우지만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은 사회로부터 고립되면서 외로움에 지친다. 사선(死線)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박 대통령이 내세운 공약이 공염불로 끝나지 않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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