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개봉해 700만명 이상의 관람객을 모은 영화 '베를린' 속 국가정보원 요원 정진수(한석규 역)는 독특한 캐릭터다. 멋진 정장과 최첨단 무기를 자랑하며 '요원의 정석'으로 자리잡은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빨갱이'를 싫어해 '운전할 때도 좌회전은 안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수시로 걸쭉한 욕을 뱉어내며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북한 고위급 인사들의 비자금 계좌를 '김정일 계좌'로 보고 끊임없이 추적을 거듭하는 터프한 인물이다.
정진수는 영화 속에서 청와대 조사관(곽도원 역)과 대비를 이룬다. 정치권에 줄을 대 승진코스를 타려는 조사관과 달리 정진수는 우직하게 자신의 신념인 '빨갱이를 때려잡는 일'에 몰두한다. 그러다보니 승진은 커녕 불혹의 나이에 여전히 총을 들고 현장을 뛰어다닐 뿐이다.
정진수라는 캐릭터를 다시 돌아보게 된 것은 최근 국정원의 상황 때문이다. 최근 국정원은 국내 정치의 한복판에 서 있다. 지난해 대선 당시 여론 조작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산 것에 이어 최근에는 국가 기밀을 해제해 정치권에 제공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최근처럼 국내 최고 정보기관이 정치판의 중심에 선 적이 있던가 싶다.
논란 속의 국정원이 또 다시 20~30년전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여줬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경기도 A대학 총장 비서실장에게 '학내 사찰성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다. A대학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학회는 지난 24일 국내 6개 대학과 최근 시국을 비판하는 시국선언을 주도한 바 있다.
국가정보원 법에는 국내 보안정보 수집 업무를 △대공 △대정부전복 △방첩 △대테러 및 국제범죄조직 관련 정보로 한정하고 있어 제기된 의혹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국정원법 위반 가능성도 있다.
국정원 고위관계자는 "해당 학교를 담당하는 직원이 최근 교체돼서 총장 비서실장에게 인사차 전화를 했을 뿐 학내 동향을 파악해 달라는 요청은 전혀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이 됐다"고 주장했다. 전화를 건 사실 자체는 인정한 것이다.
국정원은 자고로 음지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일하는 기관이다. 정치권에서 자꾸 모습을 비추는 것이 국민들 눈에 곱게 보일리 없다. 국정원이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정치권력의 영향에서 벗어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국민들은 정치인들과 정치 놀음에 몰두하는 국정원이 아니라 '베를린' 정진수 같은 우직한 국정원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