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신군부에 짓밟힌 '서울의 봄' [뉴스속오늘]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신군부에 짓밟힌 '서울의 봄' [뉴스속오늘]

차유채 기자
2024.12.12 06:00
[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12·12 반란 주역들. 가장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노태우, 다섯 번째 전두환 등이 보인다
12·12 반란 주역들. 가장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노태우, 다섯 번째 전두환 등이 보인다

1979년 12월12일,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 노태우 당시 9사단장이 이끌던 대한민국 육군 내 불법 사조직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가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신군부 세력은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이자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를 강제 연행했다. 최 대통령의 거절에도 이들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체포해 정승화 연행 재가를 설득했고, 결국 최 대통령은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했다.

12·12 군사반란을 기점으로 전두환은 정부를 장악했고, 10·26 사건 이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수많은 민주화 운동, 이른바 '서울의 봄'은 무력 진압되면서 무참히 짓밟혔다.

전두환 vs 정승화…생일잔치 빙자한 반란의 시작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 /사진='서울의 봄' 예고편 캡처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 /사진='서울의 봄' 예고편 캡처

전두환이 득세하기 시작한 건 1979년 10월26일, 10·26 사건 직후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행동반경을 비정상적으로 넓혔다.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에 위협이 될 정도였다. 둘은 사건 수사와 군 인사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었다.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빙자해 윤일균 중앙정보부 제1차장 겸 부장 직무대리, 오탁근 검찰총장, 손달용 치안본부장 등을 보안사로 불러들이는 등 압박을 가했다. 심지어 정부 각 부처 차관을 불러들이며 대통령 흉내를 냈다.

정승화는 전두환에게 "당신은 군인이지 정치인이 아니"라고 경고했지만 소용없었다. 두 사람의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정승화가 10·26 사건을 일으킨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했다.

/사진=유튜브 채널 '달리' 캡처
/사진=유튜브 채널 '달리' 캡처

1979년 12월12일 저녁, 반란 세력은 작전명 '생일 집 잔치' 아래 행동을 개시했다.

전두환은 수일 전부터 반란 실행 날짜를 12월12일로 정하고, 생일잔치를 빙자한 회식에 친(親) 정승화 계열의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을 초대했다. 전두환은 연희동 비밀 연회장에 이들의 발을 묶었다.

그러나 회식 자리에 전두환이 나타나지 않고 정승화가 납치됐다는 전화가 걸려 오자,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대로 복귀했다.

"오늘 밤은 서울이 최전방" 대통령 재가는 없었다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 /사진=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 /사진=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그러나 상황은 이미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전두환 측은 최전방 부대까지 서울로 불러 모았다.

"오늘 밤은 여기가 최전방이야! 밀리면 우리 다 죽는다고!"

"김일성이 오늘 밤에 때리쥑이도 안 내려옵니다"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당시 상황을 위와 같이 그리며 신군부 세력의 만행을 극단적으로 표현했다.

결국 신군부는 정병주와 장태완을 체포하는 데 성공했고, 반란 진압군은 무력화됐다.

이 모든 사태는 최 대통령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신군부가 총리공관을 장악하면서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차단됐던 최 대통령은 '국방부 장관의 배석이 없다'는 이유로 정승화의 연행·조사를 재가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이에 신군부는 노 장관을 찾아 최 대통령에게 데리고 갔다. 결국 13일 새벽 5시, 최 대통령은 정승화 연행을 재가했다.

다만 최 대통령은 재가 날짜와 시간을 12월 13일 오전 5시 10분으로 기재함으로써, 12일 밤에 이뤄진 정승화 체포가 재가 이전에 벌어진 불법행위임을 짚었다.

군부에 짓밟힌 '서울의 봄'
12·12 군사반란의 주역 전두환·노태우가 1996년 8월26일 1심 선고공판에서 손을 맞잡은 모습. /사진=머니투데이 DB
12·12 군사반란의 주역 전두환·노태우가 1996년 8월26일 1심 선고공판에서 손을 맞잡은 모습. /사진=머니투데이 DB

전두환 일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통제하면서 정권 찬탈에 나섰다. 시위가 이어지자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는 5·18 민주화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신군부는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 진압했다.

10·26 박정희 사망과 함께 찾아온 민주화 기대, '서울의 봄'은 끝났다. 전두환은 대장, 중앙정보부장을 거쳐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절친 노태우 역시 대장, 내무부 장관 등을 거쳐 전두환의 후임 대통령을 지냈다. 군사 반란에 가담한 신군부 인원들도 요직을 싹쓸이했다. 12·12 군사반란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던 장성들은 내쫓기거나 보직이 변경됐다.

12·12 군사반란은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정당화됐다. 그러나 김영삼의 문민정부는 이를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 사건으로 규정했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결국 1995년 12·12 군사반란 가담, 뇌물 수수 등으로 기소돼 각각 무기징역, 17년형 징역형과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1997년, 두 사람은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2024년 12월3일, 45년 만의 비상계엄
윤석열 대통령이 3일 밤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긴급 대국민 특별 담화를 하고 있다. /사진=뉴스1
윤석열 대통령이 3일 밤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긴급 대국민 특별 담화를 하고 있다. /사진=뉴스1

역사의 암울한 페이지로 영원히 봉인될 줄 알았던 내란은, 그러나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윤석열에 의해 재연됐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45년 만이다.

윤 대통령은 국회 요구에 따라 약 6시간여 만인 4일 새벽 계엄 해제를 선언했다. 비상계엄 선포 나흘 만인 지난 7일,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국회 본회의 표결에 부쳐졌다. 그러나 재적 의원 300명 중 국민의힘 소속 의원 108명 중 105명이 표결에 불참,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자동 폐기됐다. 국민의힘 의원 중 안철수, 김예지, 김상욱 의원 등 3명만 표결에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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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유채 기자

안녕하세요. 스토리팀 차유채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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