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진이 인생의 전부였던 '김낙수의 시대'는 끝났다."
지난해 연말 인기리에 종영한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속 주인공 김낙수는 IMF 외환위기를 뚫고 입사해 25년간 단 한 번의 승진도 놓치지 않고 달려온 인물이다. 만년 과장으로 지방에 좌천된 동기도 모른 체하며 상무 승진을 향해 달리던 그의 삶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 직장인들의 전형적인 초상이자 목표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일터에서 '김낙수'를 찾기는 쉽지 않다. 승진이 곧 성공이자 신분 상승으로 통하던 공식이 깨지고, 승진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거나 회피하는 '의도적 언보싱(Conscious Unbossing)' 현상이 직장가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승진을 해도 권한은 없이 책임과 업무량만 늘어날 뿐 임금 인상 폭은 턱없이 작다는 현실적 계산이 깔리면서 승진 자격시험을 일부러 누락하거나 관리자 보직을 사양하는 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책임과 스트레스는 배로 늘어나는데 월급은 찔끔 오르잖아요."
대기업 6년 차 30대 직장인 A씨는 최근 사내 승진 시험 서류 제출을 스스로 포기했다. 승진을 하지 못하면 은연 중에 '상급자 기대에 미치지 못한 직원'으로 낙인찍히는 분위기가 부담스럽긴 하지만, 권한 없는 책임만 늘어나는 관리자 자리를 원치 않아서다.
A씨는 "주변 동료들과 얘기해 보면 승진하고 싶지 않다는 의견이 압도적"이라며 "특히 법적 책임이 커지는 직무일수록 승진을 거부하는 현상이 심하다. 승진 누락으로 인한 시선은 부담스럽지만, 그렇다고 승진해서 내 삶을 희생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라고 털어놨다.
이러한 현상은 2030세대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40대 중장년층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어학 성적이나 평가 자료를 일부러 제출하지 않으며 '의도적 언보싱'을 선택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또 다른 직장인 B씨는 "영혼을 바쳐 일하고 승진했지만 결국 50대도 되기 전에 등 떠밀리듯 퇴직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봤다"며 "몸과 마음을 다 털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갈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무리한 승진보다는 정년까지 무탈하게 직장 생활을 유지하는 게 현실적 목표"라고 했다.
온라인 상에서도 "사실 월급 좀 오른다고 생활이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스트레스 받느니 안하고 말지", "보상은 적고 책임은 많으니 이젠 가짜 감투에 속아 노예처럼 일할 젊은이는 없다", "어줍지 않게 돈 조금 더 받고 개처럼 굴려지느니 그냥 적당한 위치에서 지내는 게 나은 것 같다", "나 직장 다닐 때 면담 신청해서 '안 나가고 일 성실히 잘 할테니, 진급 시키지 말아달라'고 대놓고 얘기했었다", "나도 떠밀려서 팀장 안했으면 오히려 계속 회사에 다녔을 지도 모른다" 등의 반응이 나왔다.

이는 각종 설문조사와 통계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지난해 청년층(19~36세) 직장인 8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향후 리더 역할을 맡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다'는 응답이 47.3%로 '불안하다(22.1%)'의 두 배를 넘었다. 리더를 기피하는 이유로는 '조직 성과 책임 부담(42.8%)'과 '업무량 증가(41.6%)'가 가장 많이 꼽혔다.
공공기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올해 1월 감사원이 발표한 '공공기관 인력운용 실태' 감사 결과에 따르면 35개 공공기관 직원 5500여 명 중 57.1%가 '초급간부 승진 기피 현상'이 존재한다고 답했다.
독자들의 PICK!
대표적으로 한전KPS의 경우 2010년 승진시험 응시 가능 인원(2673명)의 6.3%(168명)에 달했던 승진시험 응시율이 2024년에는 응시 가능 인원 1110명 중 0.7%(8명)로 급감했다. 승진을 기피하는 주된 원인으로는 업무 과중(62%)과 불충분한 보상(52%)이 지목됐다. 초급간부뿐만 아니라 임원(상임이사) 승진 역시 조사 대상 35개 기관 중 31곳에서 기피 현상이 나타났으며, 가장 큰 이유는 '낮은 임금'이었다.
이 같은 '의도적 언보싱'은 한국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감사원은 이를 "MZ세대의 등장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시대 흐름"으로 규정했다.
실제로 최근 인도에서는 한 Z세대 여성 직장인이 "현재의 워라밸에 만족한다"며 주 40시간 이상 근무해야 하는 관리직 승진 제안을 거절해 화제를 모았다. 유럽 등 인구 감소를 겪는 국가들 역시 차세대 관리자 공백으로 인한 조직 운영 차질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직장 참여도 조사기업 엔펄스의 토마시 슈클라르스키 CEO는 "글로벌 조사 결과를 보면 Z세대 가운데 고위 관리직을 맡아 상사가 되고 싶어 하는 비율은 약 6%에 불과하다"며 "젊은 직장인들은 관리직에 따르는 과도한 책임과 업무 부담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승진보다 삶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희생의 크기를 신중하게 계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의도적 언보싱의 핵심은 승진에 따른 책임과 업무량은 크게 늘어나는데 권한과 보상, 고용 안정성은 충분히 따라오지 않는다는 인식"이라며 "승진을 거부하는 것을 개인의 의욕 부족으로 볼 것이 아니라 기업의 인사·보상 체계에 문제가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중간관리자가 되면 실무를 내려놓지 못한 채 팀원 관리와 실적 책임, 인사평가, 갈등 조정까지 떠안게 된다. 하지만 그에 비하면 임금 상승폭은 미미한 편이다. 여기에 4050 세대의 경우 구조조정 시 중간관리자가 우선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고용 불안까지 더해지면서, 워라밸과 득실을 따져 승진을 기피하는 현상이 전 세대로 확산하는 양상이다.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해외처럼 중간관리자 계층을 축소하거나 외부 영입을 시도할 수도 있지만, 국내 기업이 이를 무작정 도입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관리자 계층을 무작정 없애면 의사 결정은 빨라질지 몰라도 현장 교육과 평가, 갈등 조정, 경영진과의 소통 기능이 급격히 약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관리자를 축소하는 것보다 관리자의 역할과 책임을 재설계해 '관리자가 되고 싶어지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 근본적인 해법으로 제시된다.
이를 위해 팀장의 인사권과 업무조정 권한을 명확히 하고 성과 보상을 강화하는 한편, 인공지능(AI)과 디지털 도구를 활용해 보고서 작성 등 반복적인 관리 업무를 줄여줄 필요가 있다. 아울러 관리직과 전문직을 분리해 관리자가 되지 않아도 높은 보상과 경력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이중 경력체계'를 구축하는 것도 실질적인 대안으로 꼽힌다.
김 교수는 "앞으로 기업은 승진을 강요하기보다 관리직을 하나의 매력적인 직업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관리직을 맡으면 더 많은 책임을 지는 대신 더 큰 권한과 보상, 전문성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실한 신뢰를 직원들에게 주는 것이 의도적 언보싱을 해결하는 핵심"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