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여 정부가 갓 출범한 2003년 4월. 정건용 산업은행 총재가 사의를 표명했다. 임기를 1년 남짓 남긴 상태였다. 대북 송금 특검에 따른 부담 때문이라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새로운 정권과의 코드 문제도 거론됐다.
'신관치 프로젝트', '재경부의 낙하산 인사 시나리오' 등 온갖 설이 나돌았다. 그때 경제팀 수장이었던 김진표 경제부총리의 해명이 걸작이었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경제팀이 새롭게 구성되면 정책 조율을 위해 국책은행장을 교체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은 사실상 경제 부처의 하나로 공무원과 같다. 국책은행장의 임기를 가급적 존중하겠지만 정책 추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불가피한 면이 있다"
경제팀 수장이었던 김진표 경제부총리가 사퇴 압력을 가했다는 소식은 '루머'에 힘을 더했지만 그는 '제청권자로서의 제 역할'이라는 논리로 맞섰다.
2년 반이 지난 지금, 산은 총재 인사 과정을 지켜보며 당시를 떠올렸다. 조용한 듯 보였던 이번 인사의 내면은 매우 치열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그 어디서도 '제청권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재정경제부장관의 제청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산은 총재 인사 절차는 교과서에서 있는 말에 불과한 듯 했다.
대신 "실세가 누굴 민다" "특정 지역 출신이 민다" 등 설이 난무했다. 그 중에는 경제부총리가 원했던 인사가 애초부터 배제됐다는 소식도 끼어 있었다. "(재경부는) 형식적 제청권만 행사했을 뿐 청와대에서 찍은 것"(정부 고위관계자)이라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김 전 부총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경제팀과 호흡을 맞출 인사"를 뽑는데 '경제팀 수장'의 뜻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헌법상 보장된 총리의 각료 제청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겠다는 뜻을 기회있을 때마다 강조해 왔다. 그러나 법률에 보장된 '재경부장관'의 제청권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을 보면 신뢰가 안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