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8000억원의 사재를 사회에 헌납하겠다고 발표했다. 기부에 인색한 한국문화에서 이만큼 큰 금액을 사회에 출연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세계 기부사에 남을 만한 거액"이란 주장도 있다. 이제 한국 사회도 성숙한 기부 문화가 발전할 조짐을 보이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그 후 벌어진 양상이 말해 준다.
기부가 결정된 후 전개되는 일을 보면 괴이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8000억이라는 거금을 기부한 당사자는 정작 이를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운용방안을 "국가와 사회의 논의에 맡긴다"는 것인데, 그 정도의 금액을 사회에 기부하는 사람이 그 용도에 대한 비전이 전혀 없다는 것은 상식 이하이다. 또한 기부가 아니라 헌납이라는 용어를 쓴 것도 의미심장하다.
둘째, 분명 8000억원은 이건희 회장 일가가 출연했지만 그 후 줄곧 정치권, 언론, 시민단체 등은 `삼성 출연금'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
이건희 회장 일가가 삼성을 통해 부를 축적했지만 개인과 기업은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재벌이 가지고 있던 폐해는 개인과 법인 사이의 연관을 애매하게 설정했기 때문에 벌어진 것 아닌가?
정상적인 출연이라면 정확히 그 주체에 따라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출연은 이건희 회장이 개인적인 결정을 내렸다기 보다는 삼성그룹 차원에서 결정한 것이 명확하기 때문에 삼성 출연금이라 부르는 것이 오히려 정확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세째, 드디어 청와대가 나서서 출연금을 쓸 용도를 찾아보겠다고 나섰다. 청와대는 운용 주체를 찾을 때까지 절차 문제를 도와줄 뿐이며 출연금의 운용 주체는 순수한 민간 조직이 될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믿을 순진한 국민이 있을까? 정부가 운용주체를 결정하면 운용주체가 정부의 의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이건희 회장 자녀가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등으로 거둬들인 돈의 규모는 1조원이 넘을 수 있다는 평가가 있다. 또한 삼성그룹은 금융을 통하지 않고는 그룹 지배가 어려운 형편이다.
삼성은 이러한 문제들을 거금의 사회헌납으로 해결하고 정부는 다급한 과제인 양극화 해소에 이를 사용하면서 삼성의 그간 문제점을 눈감아 주려 한다는 추정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현정부는 수십 년 전 과거 일도 시시비비를 따지기 위해 과거사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은 수년 전에 벌어진 일 때문인데도 다시 애매하게 매듭지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현정부가 과거사를 들추는 것이 과거 일에 대한 보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응당 그 이유는 과거의 잘못을 명확히 하여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말자는 교훈을 삼으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진행형으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도 시시비비를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정부의 의도는 순수하게 해석될 수 없을 것이다.
이건희 회장 일가도 법적으로 심판 받고 그래도 떳떳하면 그 때 사재를 털어 사회에 출연하고 자신의 철학에 맞게 그 돈이 쓰여질 구상도 함께 내 놓으면 좋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