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같은 '갑'만이 살아남는다

'을'같은 '갑'만이 살아남는다

대담=김종현 부국장
2006.08.22 08:55

[머투초대석]우종완 더베이직하우스 사장

가업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아버지 잘 만나 무의도식 하고 싶지는 않았다. 바닥부터 배우며 세계 최고의 의류 회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41살 우종완 더베이직하우스(2,340원 ▲10 +0.43%)사장의 성공 스토리다.

우종완 사장은 부산대에서 섬유공학을 전공했다. 본인은 사진을 배우고 싶었지만 아버지 우한곤 회장이 손수 섬유공학과 원서를 써 제출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중학교 졸업후 국제시장에서 속옷 가게 점원으로 시작해 염색공장 사장까지 사업을 일군 아버지의 욕심이다.

부전자전이랬던가. 아들 우종완 사장의 사업 수완도, 욕심도 아버지 못지 않았다. 졸업 후 태광에 입사한 그는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염색공장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염색공장은 매출의 한계가 있었다. 현상유지는 가능하겠지만 젊은 우 사장은 이에 만족할 수 없었다.

이 때 그의 시선을 사로 잡은 건 옷이였다. 우 사장은 "사돈 관계였던 박순호 세정 회장의 의류사업도 보고 또 국내외 전시회를 다니며 옷을 팔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당시 결심을 설명했다. 부가가치가 높은 의류 사업에 눈을 뜬 것이다.

그는 결심을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아버지에게 약간의 돈을 빌려 부도난 봉재공장을 인수했다. 하지만 사업은 쉽지많은 않았다. 우 사장은 "시장에서 1년동안 발로 뛰며 속옷 유통을 배우며 돈 벌기가 진짜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며 "월급날이 다가오는게 두려웠을 정도"라고 사업 초기 힘든 시절을 전했다.

납품을 받아 공장을 돌리기 위해 거래처 접대, 인맥을 이용해 사정하기 등 오만 것을 다해봤다. 우 사장은 "직원들이 어깨가 쳐저 있을 때는 내가 영업을 못해 그들에게 폐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 뿐"이였다며 회사의 능력보다는 친분 관계에 따라 주문 수량이 정해지던 시절, 고전을 거듭하던 모습을 회상했다.

하지만 우 사장은 위기 속에서 기회를 발견했다. 실력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수출에 눈을 뜬 것이다. 일본 수출을 통해 그의 봉재공장은 제자리를 잡았다. 수출로 인정받은 그의 실력은 국내 사업으로도 이어졌다.

염색공장에서 봉재공장으로 말을 갈아탔을 때 발휘했던 그의 사업적 직감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일본에서 '유니크로'를 본 우 사장은 "외환위기라는 어려운 시절을 겪으며 소비자 역시 내는 돈보다 만족감이 높은 합리적 제품을 선택하는 시절이 올 것으로 생각했다"며 베이직하우스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기회는 바로 찾아왔다. 외환위기가 지날 무렵 지인을 통해 대형 마트에 'PK폴로셔츠'를 납품했다. 우 사장은 "이때 브랜드 테그에 전화번호를 남겨놨더니 다른 마트에서까지 주문 전화가 밀려오기 시작했다"고 웃었다. 이렇게 만든 옷에 자기상표를 붙여 1000장을 납품했고 이것이 2주만에 매진을 기록한 것이다. 2000년 12월 우 사장은 더베이직하우스라는 캐주얼 의류 회사를 만들었고 이제는 150개 매장에서 16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는 최고 의류 회사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그는 올챙이 시절을 잊지 않는다. 영원한 약자 '을'의 어려움을 몸과 마음으로 다 겪어본 그였기에 '갑'이 된 지금도 겸손함을 강조한다. 우 사장은 "사업은 일하는 모두가 서로 발전하고 돈도 같이 벌어야 한다는 마음이 필요하다"며 "지금도 베이직하우스 사원들에게 이점을 강조한다"고 전했다. 스스로 '을' 같은 '갑'이 되야 믿음도 생기고 '갑'에게 큰소치 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있는 '을'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업관이다.

우 사장의 경영 하나하나에서도 이 같은 겸손이 살아있다. 우 사장은 "봉재공장 시절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사는 아주머니들에게 돈을 제때 못줘봤던 어려움을 겪어보니 지금 하청업체들이 이것을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라며 15일 현금 결재 도입 배경을 밝혔다.

전 사원들에게 주고 있는 강남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식권도 마찬가지다. 전 재산을 맏기기 위해 찾아온 대리점주들에게 얻어먹지 말고 손님대접을 잘 하라는 뜻이다. 우 사장은 "철저하게 자존심을 지켜가며 일할 수 있는 직장이 되야 직원들도 정직하고 일도 잘 할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우 사장의 겸손한 마음은 수익을 중시하는 경영 철학으로도 이어진다. 보통의 의류 회사라면 명동 또는 강남에 1호점을 내게 마련이지만 베이직하우스는 이제야 명동에 진출했다. 것도 150호라는 간판을 달았다. 우 사장은 "직원들이 명동점을 하겠다고 했을 때 이익 낼 자신 있다면 해보라고 했다"며 "그 결과 보다 신중한 접근이 가능했고 지금은 비싼 월세를 내면서도 명동점 역시 흑자 점포로 자리잡았다"고 수익 우선 경영을 전했다.

이제 우 사장은 전 세계를 향해 나아갈 준비를 하고있다. 디자이너 1명이 4000만명이 입을 옷을 만드는 것보다 50억 인구가 입을 옷을 만들면 원가 경쟁력이 더욱 좋아진다는 것이 우 사장의 세계 경영론이다. 그는 "나이키가 막대한 돈을 타이거우즈에게 주고도 이익을 낼 수 있는 것은 전 세계에 팔기 때문"이라며 "해외 사업은 단순이 많이 팔기 위함이 아니라 회사의 생존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은 우 사장과 더베이직하우스에 최상의 조건을 선물했다. 중국 현지 공장을 통해 생산원가를 크게 낮췄고 또 추가 비용 없이 옷도 팔 수 있는 것이다. 우 사장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옷을 중국에서 팔려면 관세 30%가 붙지만 현지 공장에서 만든 옷은 이것이 없다"며 "여기에 디자인과 광고는 우리나라에서 쓰는 것 그대로 쓰니 중국 회사들보다도 더 높은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2004년 1호점으로 출발한 베이직하우스 중국 사업은 이제 59개 매장에서 국내보다 더 높은 수익성을 자랑하고 있다.

우 사장은 의류 사업을 벤처라고 표현한다. 높은 부가가치 때문만은 아니다. 세계 5대 의류 생산 강국인 우리에게 세계시장은 아직도 미지의 땅이기 때문이다. 우 사장은 "세계 최고 브랜드가 모인 중국뿐 아니라 미국, 유럽에서도 실패와 성공 경험을 쌓고 싶다"고 강조했다. 젊은 회사 베이직하우스가 앞장서 세계화의 경험을 우리 의류 업계에 만들어 주겠다는 포부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이제는 누구나 인정할 만큼 성공한 그지만 개인적 꿈과 생활만은 아직도 소박하다. 휴가를 꿈꾸는 셀러리맨이자 엄한 아버지의 장남, 또 두 아들의 아버지인 것이다. 얼마 전 한 인터뷰 기사에서 '담배를 물었다'는 문구 때문에 아버님에게 혼났다는 그는 일에 바쁘다보니 아들들에게는 좋은 아버지가 못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크다며 아쉬워했다. 또 개인적으로 하고 픈 일을 묻는 질문에 우 사장은 "1달 정도 어디로든 놀러가봤으면 좋겠다"며 소탈하게 웃었다.

정리=최정호기자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