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금자본주의]<하-2>적극적으로 의결권 행사하는 연기금들
당신이 국민연금 가입자라면 당신은 LG산전, 유한양행의 주주다. 국민연금 기금은 LG산전 지분을 12.73%, 유한양행 지분을 10.16%를 보유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교직원이라면 삼양식품, 하이트맥주의 간접적 주주일 것이다. 교직원 공제회는 삼양식품 지분의 28.75%, 하이트맥주의 9.85%, 영남제분의 7.96%를 보유하고 있다.
머니투데이 국내 주요 연기금들을 조사한 결과, 국내 연기금들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은 83곳인 것으로 나타났다.
연기금 보유지분이 5% 미만인 기업수까지 치면 연기금 가입자가 간접투자하고 있는 기업수는 수백개로 늘어난다. 국민연금은 544개사, 사학연금은 106개사, 공무원연금은 63개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지분 커지면서 '주인의식' 커져
기금이 늘고 주식 투자가 늘면서 연기금들의 의결권 행사는 더 적극성을 띄고 있다. 국내 연기금들은 "기금이 보유한 모든 종목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한다"는 지침을 가지고 있다.
특히 544개 기업 주식을 보유한 국민연금은 이중 1% 이상 보유종목 388개에 대해 직접 의결권을 행사한다.
머니투데이가 공시를 조사·분석한 바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올해 1분기에 열린 주주총회에서 처리한 580건의 의안 중 20건에 대해 '반대' 의견을 밝혔다.
국민연금이 반대한 안건은 주로 이사, 감사 선임이나 정관 변경의 건이었다. 특히 '이사 혹은 감사위원회 위원 선임'(16건) 반대가 많았다. 사유는 대부분 '출석률 저조'.
3월 16일 열린 두산중공업 주총에서 박용성 회장이 재선임됐을 때, 국민연금은 '과거 기업가치를 훼손한 전력이 있다"며 안건에 반대하기도 했다.
동양제철화학은 3월 주총에서 전환주식을 도입하기 위한 정관 변경을 시도했다가 국민연금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주주가치를 희석시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독자들의 PICK!
사학연금은 올해 1분기까지 총 52건의 안건 중 5건에 대해 반대했다. 주로 '이사 보수 한도 승인', '적정배당' 등 돈 문제에 까다로웠다.
지난 2월 28일 열린 삼성전자와 삼성전기 주총에서 사학연금은 "경영 성과에 비해 과도하게 확대한다"며 이사 보수 한도 확대에 반대했다.
지난 3월 대성산업 주총에선 적정배당 미달 등 이유로 제무제표(안) 승인을 거부했고 이사·감사위원 선임에서도 "주주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이가 이사·감사로 참여해야 한다"면서 또 한 번 반대표를 던졌다.
◇"주주가치ㆍ기업가치 함께 높이세"
두 연금의 의결권 행사 내용을 보면 그다지 '공적'인 냄새는 풍기지 않는다. 그보다는 기업 투명성 제고, 주주가치 향상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사학연금이 대성산업 주총에서 회사측이 내세운 감사 선임에 반대한 것이 대표적이 예다. 사학연금은 이때 "주주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주주추천 감사를 선임하라"고 밝혔다.
사학연금은 최근 모 자산운용사, 모 투자자문사와 함께 투자 기업에 공식 질의서를 보내기도 했다. '이해할 수 없는 회계 처리', '사주의 친인척이 비전문가인데도 특정사업의 임원을 맡은 이유' 등 주로 투명경영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국민연금 역시 투자기업에 투명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 예로, 현대백화점은 지난 3월 주총에서 정관 변경을 통해 사외이사의 임기를 단축시키려 했다가 국민연금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러한 의결권 행사에는 기준이 따로 있다. 국민연금에는 '의결권 행사 지침', 사학연금에는 '금융자산운용지침' 등 연기금별로 만든 '지침'이 기준을 세워준다.
가령, 국민연금이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의 재선임을 반대한 데엔 "성실의무를 위반한 이사 선임에 대해 반대하는 의결권을 행사하라"는 의결권 행사 지침이 작용했다. 연기금 역시 다른 펀드와 마찬가지로, 주주가치 제고가 의결권 행사의 제1원칙이다.
김문수 국민연금 대외협력팀장은 "국민연금은 가입자에게 이익이 되도록 신의, 성실 원칙에 따라 장기적으로 기업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의결권을 행사한다"며 "주주가치를 높임으로써 연금기금이 장기적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연기금들의 의결권 행사 스타일은 '사회주의'적이라기 보다는 '자본주의'적이다. 피터 드러커가 경고했듯 노동자가 연금을 통해 기업을 지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대신 수탁자 신임 의무를 진 '운용전문가'들이 기업가치 제고라는 목표를 중심으로 대화, 제안, 의결권 행사에 나서는 일이 잦아졌다.
93년부터 사학연금에서 주식을 운용한 이세우 사학연금관리공단 주식운용팀장은 "(연기금자본주의 정신은) 그동안 면면히 흘러왔지만 최근 들어 적극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서범석 이사장의 결단에 따라 주식투자를 5000억여원으로 지난해보다 2400억여원을 늘렸다"며 "저금리 시대에 연기금이 기업주식의 장기보유가 늘어난 만큼, 연기금과 기업은 서로 윈윈(동반발전)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