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이사 다시보기上]경영진과 직간접 연고…독립성 힘들어
영업사원 출신으로 무려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1999년 세계적 IT기업인 휴렛 패커드(HP)의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른 칼리 피오리나. 6년 연속 포춘지 선정 '세계 최고의 여성CEO' 타이틀을 지키며 화려한 명성을 떨쳤지만, HP 이사회는 2005년초 그를 출석시키지도 않은 채 합병실패 및 실적악화 등을 이유로 '해고'를 결정했다.
피오리나는 "이사회는 나를 대면할 용기가 없었다"며 강한 불만을 표했지만 결국 "내가 한 선택과 결과를 평온하게 받아들인다"며 회사를 떠났다. 당시 해임을 주도한 이들은 한때 그에게 절대적 지지를 보냈던 사외이사들이었다.
국내에서는 지난달 29일SK텔레콤(75,400원 ▲1,700 +2.31%)이사회가 반도체 회사 인수안건을 부결시킨 것을 두고 '사외이사들의 반란' 운운하며 일대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실적이 나쁜 CEO는 견딜 수 없다"는 냉엄한 기업세계의 현실을 재확인시키는 하나의 사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처럼 외국에서는 사외이사들이 이사회 내에서 '절대권력'을 행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영 실적은 물론 크고 작은 경영 의사결정, 기업문화, 급여체계, 심지어 경영진의 사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문제가 있는 사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눈감아줬다가는 자칫 소송을 당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국내 대기업들의 현실은 어떤가. 과거에 비해 사외이사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거수기', '고무도장' 등의 명예롭지 못한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국내 30대 상장사들의 사외이사 수는 총 199명. 이들은 지난해 5263건의 경영 의사결정에 참여해 겨우 15건에 대해서만 반대의견을 냈다. 반대율은 불과 0.29%. 그나마 포스코와 KT&G, 대우조선해양 등 3개 기업에서만 반대가 나왔다. 나머지 기업들은 단 한건도 없었다는 얘기다.
삼성전자(167,800원 ▲2,000 +1.21%)의 경우 총 13명의 이사 중 절반 이상인 7명이 사외이사들로 채워져 있다. 대부분 교수나 전직 관료, 법조인 출신들이다. 후보추천위원회를 통해 철저하게 독립적으로 사외이사를 선발하고, 이들의 발언은 모두 이사록에 정리되기 때문에 사내이사들의 전횡이 불가능하다는 설명이지만 단 한건의 반대의견도 없을 정도로 완벽한 경영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현대차(509,000원 ▲28,500 +5.93%)역시 총 9명의 이사회 멤버 중 5명이 교수, 전직관료, 법조인 등 사외이사지만 부결된 안건은 커녕 반대의견조차 없었고, 대부분의 다른 대기업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한 대기업 임원은 "이사회를 갖기 전에 사외이사들과 미리 충분한 논의를 거치거나, 이사회 도중 개인의견이 나와도 토론 끝에 공식적인 반대의견 없이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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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의 사외이사는 이에 대해 "기본적으로 안건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갖지 못한 채 이사회에 참여하거나, 경영진들과 직간접적으로 맺어진 관계들이 있어 솔직히 공식적으로 독립의견을 내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물론 SK텔레콤의 예에서 보듯 실질적인 사외이사 기능 강화 등을 통해 투명성을 높이려는 대기업들도 차츰 늘고 있다. 포스코나 두산의 경우 CEO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시키거나 독립적인 의사결정 기구의 역할을 하도록 하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시민단체의 감시 등 기업 경영환경이 달라지면서 사외이사의 견제역할에 대한 사회적 기대도 커지는 추세"라며 "실제로 이런 분위기를 타고 이사회에서 안건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내는 사외이사들이 전에 비해 많이 늘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