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N 세상 그리고 우리는]
최근 우리 국민은 큰 슬픔 속에 두 분을 떠나 보내드렸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수환 전 추기경. 이생과 이별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정치 또는 종교의 시각에서 두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수 있지만 국민적 공감 속에서 퍼져 나간 애도의 큰 물줄기 앞에 그 차이는 더 이상 차이일 수 없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놀란 이런 국민적 추모열기의 뿌리는 무엇이었을까요?
공자는 제자 안연이 32살의 젊은 나이에 죽자 통곡합니다. 제자들이 위로하자 “저 사람을 위해 비통해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그렇게 할꼬”라고 말합니다. 보려고 해도 더 이상 볼 수 없고 내면의 세계를 나누려고 해도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에로스의 상실이 공자를 그토록 슬프게 했다고 성균관대 신정근 교수는 해설합니다. 공자와 안연은 사제 간의 형식적 틀을 초월해 소통과 교감의 두터운 인연을 쌓은 게 분명합니다.
노무현과 김수환 두 분,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분 다 ‘바보’라는 말을 좋아했습니다. ‘바보 노무현’이란 별명을 좋아했던 노 전 대통령. 자화상 밑에 ‘바보야’를 적어 넣은 김 전 추기경. 쉬운 타협보다 어려운 길을 마다 안 해 불린 이름이지만 ‘약삭빠름’이 생존의 무기인 현 시대에 그분들이 보여 준 바보 같은 삶은 정서적인 소통을 통해 국민들과 가까와지기에 충분했습니다.
한 분의 종교지도자는 국민들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기쁨의 현장을 함께 함으로, 한분의 전직 대통령은 거친 언행으로 자주 도마 위에 올랐지만 그 투박함과 소탈함이 보통 사람과 비슷하구나 하는 동류의식으로 국민들 곁으로 다가선 것입니다. 그래서 전 국민적으로 그 분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에로스적 상실감이 큰 거지요. 사랑 또는 민주주의라는 숭고한 가치를 저 위 추상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땅을 딛고 있는 많은 사람과 함께 했기에 그리움이 큰 것이겠지요.
그 분들의 떠남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를 보게 됩니다. 김 추기경이 남기고 간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던 노 전대통령의 선언. 정의와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 우리 몫으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호흡하며 하루 하루 역사의 씨줄과 날줄을 만들어가는 우리의 일상은 어떻습니까? 떠난 자가 남은 자에 대해 슬퍼할 정도가 아닌가요?
장자 내편 제6장 대종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자상호가 죽자 그 친구들은 “그대는 이미 참의 세계로 들어갔는데 우리만 아직도 사람 상태에 머무르고 있네‘라고 노래를 부릅니다. 참이 없는 세계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염려가 깊게 배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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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상대방과 공생하는 공간조차 남겨두지 않으려 하는 배타주의, 수단의 정당성보다 결과만을 중시하는 맹목적 성과주의, 정신적 풍요로움보다 물질적 성취를 앞세우는 배금주의, 올바름을 추구하는 바보 같은 우직함보다 반칙과 편법에 기대가는 약삭빠름이 덕목이 돼버린 의식의 부조리, 슬픔을 슬픔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정파적 관점을 실어버리는 ‘존재의 가벼움’. 이게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아닐까요?
안톡 슈낙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서 말합니다. “슬퍼할 줄 모르는 사람, 슬픔을 모독하는 사람도 마르지 않는 슬픔의 샘을 자극한다”
두 분을 떠나 보냄이 우리에게 ‘정신적 각성제’로 남기를 기대합니다. 벽에 갇히고 다름에 매몰돼 따로 가는 닫힌 세계가 아니라 성장과 풍요, 자유와 사랑을 함께 누리는 열린 세계가 역사와 우리가 걸어갈 길이라는 것을 두고두고 깨우쳐 주는 그런 각성제 말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곳의 삶을 마무리하고 떠날 때
그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못다한 사랑을 해주리라는 믿음
진실하고 용기있는 삶을 살아주리라는 믿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주리라는 믿음
우리도 그들의 뒤를 따를 때까지
이곳에서의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리라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에 걸맞게 살아가는 것은
아직 이곳에 남아있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살아올 기적 살아갈 기적, 장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