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회만 주어지면 업계의 판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2000년 초봄, IT혁명, 벤처붐, 신경제 열풍 속에 IT업계와 금융계에 자신감이 넘치는 두 신성(新星) 기업이 있었다. 미래에셋과 야후. 한곳은 토종, 다른 곳은 글로벌기업이라는 차이만 있었다. 경제부로 옮겨간지 얼마 안된 초보 경제부 기자 시절 두 기업의 CEO(미래에셋 박현주 대표, 야후코리아의 A대표)의 육성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당시 몸담고 있던 언론사 경제부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 자리에서였다.
당시 증권업계는 삼성전자보다 비싼 새롬기술 같은 IT주가 연이어 출현했지만 그 못지 않은 급락주식도 있고 사기거래도 끊이지 않아 투전판 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에서 40대 금융인이던 박현주 대표는 뮤추얼펀드라는 새로운 상품을 소개해 뿌리내리게 했고 그 상품에 ‘박현주1호’라는 생소한 이름을 붙였다.
42세의 그는 미래에셋자산운용 대표로 ‘자산운용회사 등록 1호’ ‘뮤추얼펀드 운영 1호’ ‘개별펀드 상장 1호’ ‘벤처투자 전용펀드 1호’ 등 증권업계 ‘1호 기록’을 양산해냈다.
여담이지만 그 당시 야후코리아의 자신감도 그에 못지 않았다. 야후가 언론사 운영을 맡으면 판을 엎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자들에게 큰 소리를 쳤다.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면 화면 상단에 선명한 YAHOO(야후) 로고가 선명하게 떠오르던 시절이었다.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언론사의 판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언론 지형은 확연히 바뀌었고 그 역할은 야후가 아닌 네이버가 맡았다. 야후는 2012년 말 한글서비스를 접고 조용히 국내 시장에서 사라졌다. 16년이 지난 지금 그때와 달리 한국에서 미래에셋과 야후, 두 기업의 위상은 현저히 달라졌다.
야후가 어려움을 겪었던 만큼 미래에셋에도 호시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위기가 아닌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금융위기, 외환위기는 빈발했고 그때마다 지수는 출렁였다. 아기를 업은 엄마도 줄서서 들었다는 인사이트펀드 열풍과 한발 앞서 외쳤던 차이나붐은 득보다 독이었다. 펀드하면 미래에셋이라는 라벨은 수년간 박스피(박스권+코스피) 시대에 무거운 굴레였다.
자연스레 남들보다 한발 앞서 인도, 브라질, 싱가포르 등 해외 금융시장을 개척했다. '토지나 주택보다 수익형 부동산', 글로벌 자산배분 등 여러 조치들은 신선한 충격을 불러왔다. 박현주 대표에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회장이라는 호칭이 익숙해졌다.
하지만 질시의 눈도 끊이지 않았다. 물론 '오늘의 미래에셋을 키운 건 내 덕'이라는 사람도 줄을 이었다. 미래에셋 펀드를 집중적으로 팔아준 곳이 박 회장과 지연, 학연이 있는 행장이 재직한 특정 은행이었다는 것에서부터, 은행계도 대기업 계열도 아닌 곳을 키우다 보니 마지못해 선택된 곳이 었다는 금융관료들의 공치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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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든 실력이든 현재의 미래에셋을 일군 것은 결국 박현주 회장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박 회장은 JP모건이 오늘날 수준으로 성장하는 데 200번의 인수합병이 있었는데 미래에셋은 이제 겨우 20회 정도니 갈 길이 멀다고 한다. 2007년에 쓴 자서전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에서 박 회장은 미래에셋을 아시아 1등 금융투자회사로 키우겠다고 했었다.
그는 올해 상반기 최대의 도전을 앞두고 있다. 대우증권 인수를 완결짓는 과정이다. 박현주 회장과 미래에셋의 성패에 따라 굳건한 국내 1위 금융투자사를 넘어서 한국의 JP모건이나 골드만삭스 같은 글로벌 투자은행의 청사진이 구체화될지 여부가 달렸다.
“선배들은 끊임없는 혁신과 도전으로 한국을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만들었지만 최근 도전과 투자를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50대후반에도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16년 전의 호기로움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