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리포트]투자상품 사고, '책임의 시차' ③英, 역할·책임 서면 합의 의무화…"사전 역할 기록하고 당국 검사서 책임규명에 활용해야"

투자상품 사고 후 수년씩 걸리는 책임 공방을 줄이려면 금융당국의 검사 결과를 조기 책임 규명에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감원이 판매사·운용사 등을 검사해 위법·부당행위를 확인하는 데서 나아가 상품 발굴·설계부터 검증·운용·판매까지 전 과정을 하나의 사건으로 종합해 금융회사 간 책임 조정으로 연결하자는 것이다. 상품 설계 단계부터 참여회사의 책임을 미리 정해두는 영국·EU(유럽연합)·호주 등 해외 선진시장의 제도가 참고할 만한 모델로 꼽힌다.
31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영국 금융감독청(FCA)은 금융상품을 설계·개발하는 금융회사가 상품 승인 절차를 갖추고 목표시장을 설정하도록 하는 '상품 거버넌스' 제도를 운용한다. 특히 여러 회사가 하나의 금융상품을 함께 만들 경우 서로의 역할과 책임을 서면 합의로 명시하도록 규정한다.
유럽연합(EU)의 금융상품시장지침(MiFID II)도 상품을 설계·개발하는 회사와 이를 판매·유통하는 회사의 역할을 구분한다. 상품을 설계·개발하는 회사는 목표시장과 유통 전략을 정하고 판매사가 상품을 이해할 수 있도록 관련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판매사는 이를 토대로 상품의 특성과 목표시장을 파악해야 한다. 유럽증권시장감독청(ESMA)은 목표시장과 유통 전략 등 상품 거버넌스 과정에서 내린 판단의 근거를 문서화하도록 하고 있다.
호주도 2021년부터 '설계·유통 의무(DDO)'를 시행 중이다. 상품 발행사는 어떤 소비자에게 상품이 적합한지를 정한 목표시장결정서(TMD)를 만들고 이에 맞게 상품이 유통되도록 해야 한다. 판매·유통업자도 관련 판매 정보를 발행사에 전달하는 등 상품 설계와 판매 과정을 연계해 관리한다.
이들 제도가 사고 발생 이후 금융회사들의 민사상 책임 비율을 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상품 설계·개발부터 판매 이후까지 참여회사들의 역할과 의무를 하나의 과정으로 관리한다는 점에서 국내 책임 규명 체계를 보완하는 데 참고할 수 있다는 평가다.

투자상품 사고 이후 책임 규명을 앞당기려면 여러 금융회사가 관여하고 구조가 복잡해 분쟁 가능성이 큰 상품을 중심으로 각사의 역할과 책임을 사전에 보다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상품 판매 전 내부 위원회 등을 통해 어떤 검토를 거쳤는지 기록하고 상품 설계·운용에 관여한 회사와 판매사 등의 역할과 책임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방식이다.
정유신 서강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판매사와 상품 설계·운용에 관여한 회사, 수탁사와 위탁사 등의 책임을 내부적인 장치를 통해 규명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일정 수준 이상의 난도가 있는 상품은 사전에 검토하고 내부 위원회에서 어떤 절차를 거쳤는지 문서로 남기는 한편 상품 설계·운용에 관여한 회사와 판매사의 책임도 사전에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사전에 책임 관계를 설정하면 감독·제재 과정에서도 이를 고려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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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 정리한 책임 관계를 사고 이후 책임 규명에도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금감원이 금융회사 간 민사상 책임 비율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검사 과정에서 각 회사의 실제 역할과 위법·부당행위가 확인된다면 이를 금융회사 간 책임 조정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법원의 최종 판단을 받을 권리는 보장하되 소송에 앞서 참여회사들이 책임을 조정할 수 있다면 피해구제 이후 다시 수년에 걸쳐 책임을 다투는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 투자자는 먼저 구제하면서 상품에 관여한 회사들의 책임은 사전에 보다 명확히 하고, 사고 이후 확인된 사실관계를 조기 책임 규명에 활용하는 체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한편, 금감원은 금융회사 간 민사상 책임비율을 당국이 직접 정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금감원은 검사·제재를 통해 관련 금융회사의 위법·부당행위를 판단하고 분쟁조정을 통해 투자자 피해구제에 나서지만, 판매사와 운용사 등 금융회사 간 구상관계는 당사자 간 소송을 통해 가려져야 하고, 금감원의 검사 결과가 관련 민사소송에서 참고될 수는 있지만 법원의 판단을 구속하지도 않는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