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배 부여잡고 바닥 뒹굴…'생존율 5%' 혁명가 쓰러뜨린 '이 병'

윗배 부여잡고 바닥 뒹굴…'생존율 5%' 혁명가 쓰러뜨린 '이 병'

정심교 기자
2023.10.08 08:00

[정심교의 내몸읽기] 권력자의 건강 이야기 ⑥쑨원과 담낭암

[편집자주] 무소불위의 독재자부터 영향력 있는 지도자까지 세계사의 주요 페이지를 장식한 이들은 세상을 평정한 '권력자들'이었다. 견고한 성(城)처럼 보인 그들의 권력은 다름 아닌 '질병' 앞에서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옛말처럼 제아무리 힘 있는 권력자도 건강을 잃으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법. 근·현대사에서 권력을 쟁취한 이들이 권력을 내려놓기까지의 건강 이야기를 연속해서 탐독한다.
쑨원(1866~1925년).
쑨원(1866~1925년).

"사람은 그 재능을 다할 수 있어야 하고, 토지는 그 이익을 다할 수 있어야 하며, 물건은 그 쓰임을 다할 수 있어야 하고, 재화는 그 흐름이 통할 수 있어야 한다."(쑨원)

2000년 이상 황제 국가였던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타이완)을 수립한 신해혁명(1911년). 이 혁명을 이끈 쑨원(1866~1925년)은 중국의 외과 의사이자 정치가, 중국 국민당의 창립자다. 신해혁명의 대성공을 계기로 그는 이듬해인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이 된다. 그는 아시아 최초 공화정부를 세우고 근대화를 이룬 인물로 평가된다.

그가 중화민국의 수장에 오르기까지는 절대 순탄치 않았다. 외과 의사 출신인 그는 의대를 졸업한 후 병원을 개업해 잠시 개원의로 생활한다. 하지만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 나라가 어려워지자 그는 "사람 치료하는 인의(人醫)로 평생을 지내느니 나라의 환부를 도려내는 국의(國醫)를 하겠다"며 혁명의 길에 들어섰다.

1616~1912년 중국은 만주족의 청나라가 지배했다. 1866년 중국 광둥성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난 쑨원은 어릴 때 하와이에서 서양 학문을 공부한 덕분에 서구의 민주주의를 일찍부터 접했고,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민주주의 신념에 감명받았다. 이에 1894년 그는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중국 광둥성 출신의 화교를 모아 중국 최초의 근대적 혁명단체인 '흥중회'를 조직했다.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연합정부 건설'을 강령으로 한 흥중회는 청일전쟁에서 패배하고, 부패가 가득하며, 무능한 청나라를 개혁하기 위해 준비했다.

장제스(왼쪽)와 쑨원. 장제스는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했고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을 지냈다.
장제스(왼쪽)와 쑨원. 장제스는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했고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을 지냈다.
혁명 시도·실패 반복하며 명성 쌓아

'오직 혁명만이 위기에 놓인 조국을 구하는 길'이라는 신념 아래 흥중회는 1895년 10월 광저우에서 무장봉기를 계획했다. 하지만 청 황실을 전복시키고 혁명을 일으킨다는 자체가 쉽지 않았다. 가담자의 밀고로 봉기가 허무하게 무산되고, 쑨원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일본으로 탈출해 망명했다. 수염을 기르고 일본인 행세를 하며 지냈다. '나카야마'라는 일본인 가명으로 세력을 모았다.

이듬해인 1896년 일본을 떠나 영국에 머물렀는데, 거기서 청나라 공사관에 체포됐다가 영국인 친구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쑨원은 석방 직후 기자회견에서 영국을 격찬하며 해외 언론들로부터 주목받았다. 이를 통해 중국 혁명의 지도자급 핵심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영국 런던에 머물던 그는 도서관을 드나들며 약 9개월간 독서에 열중한다. 이 기간에 쑨원은 경제학자들인 카를 마르크스와 헨리 조지 등의 저술을 탐독했고 사회 과학의 여러 분야를 연구했다. 이때 그의 혁명이념인 '삼민주의(민권·민족·민생)'의 윤곽이 만들어졌다.

그는 "만주족의 청나라를 물리치고 한족의 나라를 새롭게 세우며(민족주의), 국민이 주인인 공화정을 도입하고(민권주의), 토지를 평등하게 나눠 모든 국민이 잘살자(민생주의)"는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외쳤다. 하지만 어떤 계획도 없었다. 군대는 물론, 그를 따르는 국민도, 가진 돈도, 충성하는 조직도 없었다. 그는 겨우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으로 봉기를 일으켰지만, 우리나라로 치면 도(道)에 해당하는 성(省)은커녕 도시조차 제대로 장악한 적이 없었다. 그가 광저우 봉기를 시작으로 10번 시도한 혁명은 10번 실패했다.

46세의 쑨원(1912년 1월경).
46세의 쑨원(1912년 1월경).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명성'을 얻었다. 1911년 10월 중국 우한 봉기 당시에 그는 미국에서 사태를 관망하다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12월 25일 상하이로 급히 귀국했다. 그의 명성에 끌린 군중이 쑨원을 보기 위해 상하이에 가득 모였다. 소문으로는 '미국에서 활동하던 그가 혁명에 필요한 군대와 자금을 가득 모아서 귀국한다'고 했다. 쑨원이 배에서 내리자 기대에 찬 사람들이 쑨원에게 "무엇을 가지고 왔느냐"고 물었다.

"혁명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왔다"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1911년 10월부터 시작된 신해혁명은 양쯔강 유역 전체로 확장했고, 약 한 달 만에 중국의 모든 성이 독립을 선언했다. 12월 29일 중국의 24개 성(省) 가운데 17개 성의 대표 45명이 참가해 쑨원을 상하이에서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총통으로 추대하고, 1912년 1월 1일 명나라의 수도였던 난징에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세웠다.

초대 임시 대총통이 된 쑨원은 베이징에 있는 위안스카이와 결판을 내야 했다. 쑨원은 당시 군사 권력자였던 위안스카이에게 공화국 정부 형태를 받아들이고 청 황제를 퇴위시킬 것을 약속받은 후 대총통 자리를 넘겨줬다. 쑨원에게는 전략이 있었다. 대총통 자리를 주는 대신 수도를 난징으로 하고, 선거를 통해 의회를 연다는 조건이 있었다. 수도를 난징으로 정하면 베이징을 기반으로 한 위안스카이가 불리하고, 쑨원이 유리했다. 거기다 국민당을 창설한 쑨원은 투표를 통해 의회를 장악한 후, 다시 정권을 잡거나 적어도 위안스카이를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쑨원보다 몇 수 앞서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대총통이 되자마자, 베이징에서 군대가 소요 사태를 일으켰다. 위안스카이는 이를 핑계로 난징으로 내려가지 않았는데, 군대가 난동을 부린 건 위안스카이가 벌인 자작극이었다. 거기다 그는 국민투표로 선출된 의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에 분노한 쑨원이 1913년 7월 위안스카이에게 맞서 전쟁을 벌였으나 상대도 되지 않았다. 그러자 쑨원은 망명에 나섰다.

58세의 쑨원(1924년 1월). 사망 한 해 전이다.
58세의 쑨원(1924년 1월). 사망 한 해 전이다.
군중 10만 명 보기 직전 기차 바닥에 쓰러져

1916년 위안스카이가 요독증으로 죽자, 쑨원은 중국의 재통일을 위해 군대를 확보했다. 소련의 공산주의자들과 손잡았다. 소련의 자금 지원을 받게 된 쑨원은 또다시 혁명을 시도하고, 또 실패했다. 그러기를 여러 번 되풀이 하던 중, 1924년 그해 마지막 날 오후 4시에 그가 탄 전용 기차가 베이징에 도착했다. 군중 10만 명이 역에서 그를 기다렸으나, 사람들은 쑨원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쑨원이 극심한 복통으로 기차 바닥에 배를 안고 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쑨원은 한 달 전에도 톈진에서 동북 군벌인 장쭤린과 회담하다 한 차례 쓰러지기도 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그는 예전과 달리 쉽게 피로를 느꼈고, 오른쪽 윗배서 혹이 만져졌다. 간·담낭(쓸개)이 있는 위치였다. 결국 1925년 1월 26일 그 당시 록펠러 병원이라 불렸던 지금의 셰허 병원에서 수술받았다. 하지만 쑨원의 배를 열었던 외과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암 덩어리가 간·담낭뿐 아니라 횡격막(가슴과 배를 나누는 근육막)과 복강 내로 퍼져 있어서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다. 외과 의사는 배를 열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닫고 나와서는 "쑨원이 살 가능성이 없으며, 10일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10일을 넘기고도 45일이 지난 3월 12일 9시 30분 만 58세로 사망했다. 처음엔 간암으로 알려졌으나, 다음날 부검 결과 담낭암(쓸개암) 4기로 밝혀졌다. 쑨원의 몸을 잠식한 담낭암은 지금의 의학으로도 5년 생존율이 5%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의사였던 그는 중국도, 자신도 구하지 못한 채 "혁명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중국을 구하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혁명 의지를 끈 담낭암은 담낭(쓸개)에서 생기는 암이다. 담낭암의 주요 원인은 담석·용종이다. 특히 △3㎝ 이상의 담석 △장기간 보유한 담석 △도재(석회화) 담낭 △담석과 동반된 췌담관 합류 이상 △만성 장티푸스 보균자 등이 위험 인자로 꼽힌다. 새로 생긴(신생물성) 용종이 담낭암과 관련될 가능성은 5~10%인데 △크기가 1㎝ 이상인 경우 △50세 이상이면서 무경형(볼록하지 않고 편평한 상태) 단일 용종인 경우 △담석이 동반된 경우 등이 위험 인자다.

간과 복막 사이에 위치한 담낭(초록색 부분) 모식도.
간과 복막 사이에 위치한 담낭(초록색 부분) 모식도.

담낭암이 왜 발생하는지는 아직 현대의학에서도 정확히 알아내지 못했다. 다만 환경적 요인과 유전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관여할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담낭암을 예방하기 위한 뚜렷한 수칙은 없다. 다만 일상생활에서 위험 요인을 피하거나 최소화하는 게 권장된다. 전체 담낭암 환자의 5년 생존율은 5% 정도로 다른 암보다 예후가 좋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이르게만 발견하면(조기 담낭암) 담낭 절제술 후 5년 장기 생존율이 90~100%로 껑충 뛴다. 조기 발견이 중요한 이유다.

초기 담낭암은 보통 증상이 없거나 담석이 있을 때와 비슷한 비특이적인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진단이 늦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가장 흔한 증상은 윗배와 오른쪽 갈비뼈(늑골) 아래의 둔탁한 통증이다. 담석이 있을 땐 심한 통증, 오른쪽 등으로 퍼지는 통증이 반복해 느껴진다. 담낭암이 진행할수록 쇠약감과 체중 감소가 나타난다. 담낭암의 30~60%에서 황달이 생긴다. 황달은 담석이 담도를 막거나 암 때문에 커진 담낭이 담도를 눌러 발생한다. 간혹 십이지장·대장 폐색이 동반될 수 있다.

담낭암 완치를 위해 가장 좋은 치료법은 절제 수술이다. 하지만 환자의 30%가량에서만 암을 완전히 절제할 수 있다. 임상 증상이 나타난 환자의 70~80%는 수술 당시 완전 절제가 불가능하다. 암이 진행된 상태에서 발견하거나 수술 후 재발하는 경우가 있어 5년 생존율은 5% 정도다.

최근 '복강경 담낭 절제술'이 보편화하면서 담낭 절제술 후 우연히 발견되는 조기 담낭암의 비율이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건강검진으로 인해 수술적 절제를 할 수 있는 담낭암 진단이 증가하고 있다. 담낭암은 현재까지 수술을 통해서만 완치할 수 있는 종양이다. 병기에 따라 수술 치료 원칙이 달라지므로, 정확한 병기 진단과 이에 따른 적절한 수술적 치료가 시행돼야 한다.

자료=서울대병원·서울아산병원 건강 정보.

참고 서적=『히틀러의 주치의들』(드러커마인드 출판)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정심교 기자

안녕하세요. 머니투데이 바이오부 의료헬스팀장 정심교입니다. 차별화한 건강·의학 뉴스 보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現 머니투데이 바이오부 차장(의료헬스팀장) - 서울시의사회-한독 공동 선정 '사랑의 금십자상(제56회)' 수상(2025) - 대한의사협회-GC녹십자 공동 선정 'GC녹십자언론문화상(제46회)' 수상(2024) - 대한아동병원협회 '특별 언론사상'(2024) - 한국과학기자협회 '머크의학기사상' 수상(2023) - 대한이과학회 '귀의 날 언론인상' 수상(2023)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