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차 십자군전쟁이 끝난 1119년.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하는 유럽인 순례자가 증가하자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몇몇 기사들이 뜻을 모은다. 기사들은 변변한 거처가 없어 옛 솔로몬 성전(템플) 위에 세워진 사원에 터를 잡는다. 템플기사단의 시작이다.
그 후 기사단의 스토리는 반전의 연속이다. 창립 회원 9명으로 시작한 기사단은 독자적 선단을 갖는 대규모 군대로 팽창하고 12세기 중반엔 키프로스 섬을 통째로 소유할 만큼 부유해졌지만 13세기엔 급격히 몰락, 마침내 14세기 초 소멸한다.
그러나 기사단은 후대의 기억 속에 부활한다. 역사적 사실 자체가 갖는 비극적 요소가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템플기사단은 각종 전승과 음모론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바그너의 오페라, '다빈치코드' 류의 소설이나 영화는 그 연장선에 있다.
최근 기사단의 이름은 또한번 드라마틱한 반전을 겪고 있다. 이번엔 추악한 몰락이다. 범죄자의 면피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지난주 세계를 경악시킨 노르웨이 극우주의자는 폭탄테러와 총기난사로 단 몇 시간 만에 76명을 살해했다. 반(反) 이슬람, 반 다문화주의를 범행동기로 내세운 그는 자신이 새로운 템플 기사단의 회원이라며 재판에서 그 제복을 입겠다고 했다.
그는 범행 전 광기 어린 선언문(메니페스토)에서 이 조직의 창설 회합에 유럽 각국의 9명이 참석했다고 주장했다. 실존했던 템플기사단의 창립회원 수와 일치한다. 전설적 영웅담, 종교적 순수성 등 템플기사단에게 덧씌워진 이미지가 범죄자에게 그럴 듯한 명분을 제공한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신의 이름을 갖다 붙여도 범죄는 정당화할 수 없다. '신의 군대'라는 템플기사단이 무고한 청소년들의 등 뒤에서 인간사냥에 나섰다면 신의 뜻을 따르기는커녕 신을 정면으로 배반한 것이 아닐까.
26일(현지시간) 이 테러범의 변호사는 그가 범행시 마약에 취해 있었고 정신도 온전치 않다고 밝혔다. 노르웨이 경찰은 그의 형량을 높일 수 있는 반인륜 범죄 혐의 적용을 검토 중이다. 미치광이 살인마,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은 신과 인류 모두를 배신했다. 성지 순례자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진짜 템플기사단이 땅 속에서 통곡할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