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황제 되려는 시진핑]② '마오쩌둥에서 시진핑까지' 중국의 권력자들

'공7, 과3' 중국의 2세대 지도자 덩샤오핑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한 1세대 지도자 마오쩌둥에 대해 내린 평가다. 중국 인민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정치지도자를 물으면 대부분이 마오쩌둥이라고 할 정도로 마오는 사랑받는 지도자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에는 덩샤오핑이 평가한 것처럼 '공7‘과 함께 ’과3'이 꼭 따라온다. 신중국을 건설하고 전 인민을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은 것은 역사에 기릴 일이지만 수십 년 독재로 남긴 후유증도 간과해선 안 된다는 의미다. 마오쩌둥부터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를 거쳐 시진핑까지 이어지는 중국 권력사는 '1인 권력'의 크기에 따라 굴곡을 겪었다.
◇절대권력 마오쩌둥, 권력분산 덩샤오핑=가장 큰 권력을 누린 이는 역시 건국의 아버지 마오쩌둥이다. 중국공산당 창당부터 국공내전, 항일전쟁까지 치른 혁명 1세대로 1949년 건국 후 사망한 1976년까지 27년간 절대 권력을 누렸다. 하지만 '정치우선론'을 내걸고 대약진운동(1958~1962년)과 문화대혁명(1966~1976)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수천 만 명에 이르는 인민들을 죽음으로 내몬 과오를 남겼다.
마오쩌둥 사후 권력 투쟁기를 거쳐 2세대 지도자로 올라선 이가 덩샤오핑. 마오와 덩은 정치색이 달랐다. 마오쩌둥이 정치를 가장 우선한 반면 덩샤오핑은 '먹고 사는 문제'를 강조했다. 덩은 당내 노선 대립으로 3번이나 실각했다. 한 번은 마오를 지지하다가, 두 번은 마오에 의해 실각을 당했다. 마오의 친위세력들에 의해 끊임없이 견제 받던 덩은 1976년 9월 마오 사망 이후를 놓치지 않았다. 전국적인 사상투쟁을 전개하면서 마오의 유훈을 내세웠던 화궈펑을 밀어내고 1978년 당 대회에서 1인자에 오른다.

덩샤오핑은 집권 이후 일관되게 개혁개방을 추진해 현재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초석을 다졌다. 경제와 함께 덩샤오핑이 가장 고민했던 대목은 정치시스템이다. 마오 독재의 폐해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덩은 1982년 당장(당 헌법)을 개정해 당 총서기도 다른 상무위원과 동등한 권력을 갖도록 규정했다. 중대 결의사안은 상무위원회 공동으로 결정토록 하는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한 것이다. 이번에 삭제가 추진되는 국가주석 3연임 이상 금지 조항이 도입된 것도 그해 12월 개헌 때다. 덩은 1992년 장쩌민에게 권력을 넘겨주면서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의 기수였던 후진타오를 차기 지도자로 할 것도 요구해 받아냈다. ‘격대지정’(현 지도자가 차기를 넘어 차차기 지도자를 미리 정하는 일) 전통의 시작이다. 권력을 나누고 질서 있는 권력승계의 기틀을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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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권력 U턴…시진핑 시대=정쩌민의 집권에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덩샤오핑의 심복으로 개혁개방의 든든한 두 축이었던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각각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과 톈안먼 시위대를 두둔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실각했다. 대신 당시 상하이 당 서기로 강경진압을 옹호한 장쩌민이 당 중앙의 실력자로 급부상했다. 장쩌민은 집권 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매년 10% 이상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경제발전을 중시하고 개방정책을 적극 옹호하는 상하이 출신 인사들을 대거 기용해 중국 3대 정치계파 중 하나인 ‘상하이방’을 만든 것도 이때다.
장쩌민은 당 총서기, 국가 주석,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까지 당, 정, 군 모두 1인자에 올랐지만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 시대와 같은 절대권력은 아니었다. 덩의 설계대로 집단지도체제가 작동하고 있었고 10년 뒤 권력을 넘겨줄 차기 지도자도 정해져 있었다. 권력이 일방적으로 장쩌민에게 집중될 수 없는 구조였다.
후진타오에 와서는 그 권력이 더 줄었다. 명문 칭화대를 졸업한 기술 관료로 공청단 중앙서기를 지낸 후진타오는 1989년 티베트 라싸에서 일어난 유혈 폭동을 신속하게 진압하면서 덩샤오핑의 눈에 들었다. 2012년 당 총서기와 국가 주석직을 넘겨받았지만 중앙군사위 주석직은 2014년에야 받을 수 있었다. 장쩌민이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갖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군사위 주석직을 물려준 이후에도 상하이방을 기반으로 막후에서 막강한 역할을 했다.
시진핑의 집권은 장쩌민과 후진타오간 권력투쟁의 산물이다. 장쩌민은 상하이방을, 후진타오는 공청단을 후계자로 밀었다. 쉽게 결론이 나지 않자 양쪽이 다 용인할 수 있는 태자당의 시진핑을 선택한 것이다. 후진타오는 상왕정치를 종식하겠다며 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직은 물론, 중앙군사위 주석직까지 한꺼번에 넘겨버렸다. 하지만 사람 좋게만 봤던 시진핑은 집권 후 완전히 달라졌다. 상대적으로 집권 기반이 약했던 그는 부정부패 척결을 내걸고 반대파들을 줄줄이 낙마시키고 자기사람을 심었다. 5년이 지난 지금 장기집권의 길까지 열었다. 마오 이후 후진타오 때까지 약화하던 중국의 1인 권력이 다시 정점을 향해 'U턴'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