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국가의 운명이 '패션'에 좌지우지될 수 있을까. 수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국으로 향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만큼은 '그렇다'가 정답이 됐다. 러시아의 침공 전쟁이 발발한 뒤 3년 가까이 전투복을 벗어본 적 없는 그다. 전쟁이 끝나고 국민들이 일상으로 돌아가면 군복을 벗겠다고 공언해왔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그는 주저 없이 검은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6개월 전 트럼프와의 첫 만남에서 받은 수모를 곱씹고 내린 결론이었다.
지난 2월 트럼프는 젤렌스키에 대해 "감사를 모른다", "무례하다"며 질책하고 점심 식사도 생략하고 내쫓았다. 이를 지켜본 유럽 국가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프랑스, 영국, 핀란드 등 트럼프와 정상회담을 한 유럽 국가 정상들은 경험을 토대로 트럼프를 대하는 법을 조언했다"고 한다. 젤렌스키에 격식을 갖춘 정장을 입고, 언행은 덜 공격적으로 하면서 트럼프에 더더욱 노골적으로 '감사 표시'를 해야 한다는 당부가 있었다. '굴욕 사건'의 당사자인 젤렌스키는 군말 없이 조언을 모두 흡수한 듯하다. 정장 차림의 젤렌스키를 본 트럼프는 흡족한 표정으로 "믿을 수가 없다. 정말 마음에 든다"며 호감을 나타냈다. 대화가 시작되자 젤렌스키는 4분30초 동안 11번이나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트럼프를 추켜세웠다.

선물도 안겼다. 골프를 좋아하는 트럼프를 위한 퍼터를 가져왔는데, 전쟁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채 살아남은 우크라이나 군인이 재활용으로 사용하던 채라는 '스토리'까지 더했다. 트럼프가 평소에 쓰는 '스카티 캐머런 뉴포트 퍼터'와 비슷한 오디세이 블레이드 퍼터로 디테일도 챙겼다. 그립 부분엔 '풋'(put)과 철자가 비슷한 '퍼트하다'(putt)를 써서 '함께 평화를 만들자(let's putt peace together)'라는 문구를 넣어 내심 노벨 평화상을 기대하는 트럼프의 마음도 흔들었다. 감동한 트럼프는 "정말 아름답다. 진정한 사랑으로 준 선물이다. 고맙다"고 화답했다. 젤렌스키는 이번 회담을 준비하며 "트럼프를 더 화나게 하지 않는 것. 우리가 어떤 양보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러시아 눈에는 90도 바뀐 젤렌스키가 밉상인 모양이다. 러시아 지역신문들은 '완전한 아첨', '백악관에서 굴욕적인 젤렌스키' 등으로 보도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전 러시아 대통령도 "키예프의 광대(젤렌스키가 과거 코미디언이었던 점을 재부각)가 군복을 다시 입으면 무슨 말을 할까"라고 깎아내렸다. 또 워싱턴에 몰려간 유럽 정상들에 대해서도 "트럼프에 아첨만 하고 이기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반면 미국과 유럽의 주요 언론들은 젤렌스키의 변화를 '합리적 유연성'으로 본다. BBC는 "정장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는지 보여줬다"고 짚었다. 또 격정적인 호소보다 유머 섞인 대화로 전쟁 종식 속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나타냈다. 그가 직전의 실수를 하나하나 만회하고, 빠른 변화로 위기를 탈출을 노린다고 분석했다. 포브스는 젤렌스키에 대해 "파트너, 동맹, 심지어 친구이자 적인 사람들과도 소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자존심을 기꺼이 타협 앞에 던진다"고까지 추앙했다. 이번 회동이 종전 선언까지 이어진다면, 자칭 '평화왕' 트럼프의 시대에 필요한 리더십의 표본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