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미국 우선주의)를 전면에 내걸면서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주장하고 나섰다. 유엔 권고시간인 15분을 훌쩍 넘겨 1시간 가까이 동안 이어진 이 같은 일방적 연설에 세계 각국은 차가운 반응을 보이면서도 이렇다 할 반박을 하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날 연설 초반 10여분은 2기 행정부 출범 8개월 동안의 성과에 대한 자화자찬으로 채워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있었던 동안 세계와 미국이 연속된 위기와 재난에 부딪혔지만 재집권 이후 미국이 다시 황금기를 맞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직접 전 세계 분쟁 7개를 끝냈다면서 유엔의 역할을 질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하고 전쟁을 막고 끝내는 일에 너무 바빠서 생각하지 못했는데 유엔이 그곳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유엔은 엄청난 잠재력이 있는데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유엔이 하는 일은 강경한 어조의 편지를 보내는 것뿐인데 후속 조치는 전혀 없고 공허한 말뿐"이라며 "공허한 말로는 전쟁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했다. 80년 전 유엔 창립을 주도했던 미국의 대통령이 유엔총회 연단에서 유엔을 원색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 동맹국을 향해서도 거친 발언을 이어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민정책과 재생에너지 문제를 언급하면서 유럽 국가들을 향해 "당신들의 나라는 지옥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기후변화 대응에 대해서도 "전세계에 저질러진 최대의 사기극"이라며 "어리석은 사람들이 만든 엉터리 예측"이라고 몰아붙였다.
세계 질서를 해치는 적대 세력으로는 우선 이란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를 꼽았다. 이란의 핵 개발과 관련해 "세계 1위의 테러 지원국이 가장 위험한 무기(핵무기)를 갖도록 허용할 수 없다"고 강조한 데 이어 유럽 등 서방 국가들이 가자지구 전쟁의 출구 해법으로 팔레스타인을 독립국가로 인정한 데 대해선 "하마스 테러리스트들에게 잔혹 행위에 대한 지나친 보상이 될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과 관련해선 러시아산 석유를 구매하는 중국·인도에 대해 "전쟁의 주요 자금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에도 "러시아 에너지 구매를 즉시 중단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라며 러시아 제재 동참을 압박했다.
집권 2기 출범 직후부터 국제 무역시장을 뒤흔든 관세 정책과 관련해선 "미국은 모든 국가와 활발한 무역과 상업 교류를 원하지만 공정하고 상호적이어야 한다"며 관세 정책이 그동안 다른 나라로부터 약탈당한 데 대한 방어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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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날 연설을 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사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순간이었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 2기 행정부 출범 이후의 성과를 자화자찬하면서 유엔과 동맹국을 상대로 공격적인 발언을 쏟아낸 대목에 대해선 핵심 지지층인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을 향한 국내 정치 유세를 방불케한다는 평가가 나왔다.
외교가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을 대하는 전 세계 각국의 태도가 집권 1기 시절 첫 유엔총회 연설 당시와는 크게 달라졌다는 얘기도 나온다. 2018년 연설 때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과장된 주장을 하자 유엔총회장의 각국 지도자들과 외교관들이 웃고 이에 트럼프가 당황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제 더이상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가볍게 넘기는 이들은 없다는 것이다.
이날 연설 초반 트럼프 대통령이 전 세계 분쟁 종식의 성과를 자찬하던 중 유엔으로부터는 전화 한통을 받지 못했다며 "유엔으로부터 받은 것은 올라가던 도중 멈춘 에스컬레이터와 고장난 프롬프터뿐"이라고 말했을 때 정도만 총회장에서 짧은 웃음이 나왔다. 미국 CNN은 "과거 조롱 섞인 웃음을 보인 이들이 지금은 트럼프 대통령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점점 더 화려한 아첨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이란의 핵개발에 대해선 직접적인 제재 의지를 드러낸 반면, 북핵 문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집권 1기 당시 이뤄진 4차례의 유엔총회 연설에선 북한 비핵화 문제와 한반도 정세를 세 차례나 다뤘다. 최근 북미 대화 재개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일단 신중한 기조를 유지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북한이 이번 유엔총회에 김선경 외무성 부상을 단장으로 한 고위급 대표단을 7년 만에 파견하면서 북미 간 물밑 대화가 이뤄질 가능성에 국제사회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