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4월3일. 카드 사태가 한창이던 때다. 은행연합회장 소집으로 명동 은행회관에 시중은행장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 김석동 당시 금융감독위원회 국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각 은행장들에게 노란색 봉투를 하나씩 돌렸다. 봉투 안에는 카드부실 해결을 위한 브릿지론 가운데 은행이 부담해야 할 3조8000억원의 은행별 할당액이 적혀 있었다.
이른바 '노란봉투 사건'이다. 이 사건은 '관치논란'을 불러일으키며 '관치'의 대표적 사례로 남았다.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던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을 따라다니는 일화 중 하나이기도 하다.
10년 전 사건을 새삼스레 들춰낸 것은 요즘 '노란봉투'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아서다. STX그룹, 쌍용건설 구조조정 과정을 금융당국이 확실하게 이끌고 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들이 나온다.
STX팬오션을 산업은행이 인수키로 했다가 산은이 STX팬오션의 부실이 너무 커 인수에 반대하자 갑자기 '법정관리'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나, 쌍용건설 경영정상화를 놓고 채권은행들이 반발하면서 워크아웃과 법정관리 사이에서 4개월이나 시간을 끌었던 것들이 대표적 사례로 지적된다. 한 마디로 일처리가 왜 이렇게 매끄럽지 못하냐는 얘기다.
일부에선 신제윤 금융위원장,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의 리더십을 문제 삼기도 하고 '훈수만 둬봤지 책임질 일을 해본 적 없는' 홍기택 산은금융 회장의 '이력'(중앙대 교수 출신)을 거론하기도 한다.
하지만 10년 동안 사회는 변했다.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이해관계자들의 이견을 조율하면서 잡음과 갈등이 터져 나오는 건 당연하다. 수익성 악화로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금융회사들에게 부실기업 지원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치열한 글로벌 경쟁 속에서 섣부른 정부의 개입은 '부당한 보조금 지원'으로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당할 가능성도 크다.
그럼에도 '노란봉투'와 같은 해결을 기대하는 것은 우리 사회 곳곳에 '일사분란한 군대식 질서'에 대한 향수가 여전함을 보여주는 사례일지 모른다. '앞으로 나란히'라는 구령에 줄을 못 맞추는 사람을 군대처럼 '얼차려'로 규율할 시대는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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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당국이 손놓고 민간에만 맡겨 두라는 얘기가 아니다. 실제로 채권은행은 오히려 '아직도 금융당국이 팔을 비튼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금융당국의 개입 방식은 '명령' 아닌 '설득과 조정'으로 변해가야 가고, 실제 그런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부실징후 기업을 조속히 가려내고 최악의 상황을 맞기 전에 수술을 시작하는 선제적 구조조정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순우 우리금융 회장은 "의사는 환자의 안색만 보고 처방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홍기택 산은금융 회장은 "STX가 조금만 더 빨리 구조조정을 요청했어도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금융당국은 이에 대한 제도적 보완을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