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관에 가지 않아도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다. OTT는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콘텐츠를 감상할 수 있는 편리함을 제공한다.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안방에서 만날 수 있다. 비용과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개봉 직후 극장을 찾아야 할 이유는 예전보다 희미해졌다.
그럼에도 어떤 영화는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 모은다. 그렇다면 오늘날 관객이 기꺼이 돈과 시간을 들여 극장에서 보고 싶어 하는 영화는 무엇일까.
극장가 불황 비껴간 '치이카와' 열풍

최근 극장가에서 눈길을 끄는 사례는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 섬의 비밀'이다. 작품은 23일 기준 누적 관객 수 약 193만명을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거대한 스케일이나 화려한 액션을 앞세운 작품이 아니더라도 관객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실제 관객들이 극장을 찾은 이유도 다양했다. 박찬종씨(30)는 '치이카와: 인어 섬의 비밀'을 선택한 이유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대형 블록버스터는 방대한 세계관 등으로 진입 장벽이 느껴졌지만, 이 작품은 가볍게 즐기기 좋았다는 설명이다.
박씨는 "영화표가 비싸다 보니 고민해서 영화를 보게 된다. 단순 리메이크나 유명 배우의 출연보다는 가치관이 영화 선택의 주요 기준이 된 것 같다"며 "나 같은 경우는 '힐링'을 위해 영화관에 가다 보니 '치이카와'를 선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캐릭터를 향한 팬심과 한정 굿즈도 관객을 움직였다. 황모씨(30)는 특전 굿즈를 받기 위해 '치이카와'를 극장에서 여러차례 관람했다. 황씨는 "원래부터 캐릭터의 팬이어서 영화 자체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지만, 특전도 다회차 관람을 하게 된 원인이었다"고 전했다.
배우? 몰입감? 관객이 극장을 찾는 이유는

두 관객의 사례는 극장 관람의 동기가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 현실을 보여준다. 작품 자체에서 위로를 얻으려는 관객이 있는가 하면, 좋아하는 캐릭터를 극장에서 만나는 경험이나 한정판 굿즈를 얻는 즐거움을 기대하는 관객도 있다. 작품의 규모나 인지도뿐 아니라 관객 각자 극장에 가야할 이유가 있다고 느끼는 지점이 다르다는 뜻이다.
물론 작품의 화제성과 인지도가 흥행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극장가 기대작으로 꼽혔던 '인턴'(누적 관객 수 90만명), '부활남: 더 레드'(누적 관객 수 33만명) 등이 아쉬운 성적을 거둔 것은 유명 배우의 출연과 익숙한 장르만으로 관객을 극장에 불러 모으기 어렵다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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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의 전통적 경쟁력은 몰입감이다. 대형 스크린과 입체적인 음향은 집에서 보는 것과 다른 감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거대한 재난과 전쟁, 압도적인 영상미를 앞세운 작품은 물론이고 배우의 미세한 표정 변화와 섬세한 감정을 화면 가득 전달하는 영화도 극장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
반면 기술적 완성도와 스펙터클만으로 관객을 붙잡기는 어려워졌다. 대형 TV와 고성능 음향 기기가 보편화하면서 가정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시청 경험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험 차별화 주목한 극장가

극장업계도 작품을 상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람 전후의 경험까지 차별화하는 데 주목하고 있다. 팬덤을 겨냥한 굿즈와 오프라인 행사도 그중 하나다.
롯데시네마는 오는 11월 1일까지 서울 잠실 월드타워 7층 시네파크에서 글로벌 인기 게임 '명조: 워더링 웨이브'와 협업한 '명조 시네마 위크'를 개최한다. 게임 개발사 쿠로게임즈와 함께 마련한 이번 행사는 팬들이 작품의 세계관을 오프라인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기획됐다.
CGV 역시 '치이카와: 인어 섬의 비밀'을 4DX로 상영하는 한편, 한정판 포스터와 관람 시점에 따른 특전을 통해 소장 가치를 더하고 있다. 영화를 관람하는 데서 더 나아가 팬덤의 취향을 반영한 경험을 제공하고, 관객이 극장을 다시 찾을 계기를 마련하려는 시도다.
관람 넘어 '문화 경험'으로

같은 맥락에서 '치이카와: 인어 섬의 비밀'의 흥행은 눈여겨볼 만하다. 작품을 보는 행위가 상영 시간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좋아하는 캐릭터를 큰 화면으로 만나고 한정 굿즈를 얻고 관람 인증 사진을 남기고, 온라인에서 감상을 나누는 일까지 하나의 문화적 경험으로 이어진다. 극장이 콘텐츠를 소비하는 공간을 넘어 취향을 공유하고 추억을 쌓는 장소로 확장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영화가 굿즈나 이벤트를 앞세워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팬덤을 겨냥한 부가 행사는 관객의 관심을 끄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작품 자체의 매력과 관람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지속적인 흥행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한 극장업계 관계자는 "이제 극장은 단순 관람 그 이상의 가치를 관객에게 제공해야 한다"며 "극장에서밖에 볼 수 없는 이유를 업계 전반적으로 고민해 봐야 할 때"라고 말했다.
OTT가 일상적인 선택지가 된 지금, 극장은 더 이상 영화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아니다. 그렇기에 '극장에서 볼만한 영화'의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압도적인 스크린과 음향으로 감동을 극대화하는 작품, 다른 관객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작품, 좋아하는 캐릭터와 세계관을 오프라인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작품까지 극장 관람의 가치는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이제 관객은 그 영화를 지금, 그곳에서 볼 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기대한다. '치이카와: 인어 섬의 비밀'의 흥행이 던지는 질문도 여기에 있다. 관객을 극장으로 이끄는 힘은 스크린의 크기만이 아니라 극장에서만 완성되는 경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