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밀의료의 시대를 살며[투데이 窓/김원석]

정밀의료의 시대를 살며[투데이 窓/김원석]

김원석 강북삼성병원 피부과 교수
2026.11.03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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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이고 과학적인' 검사 필요하지만
질병설명·치료방향 정할 뿐 삶 규정못해
위험과 확률 계산만이 의사 역할은 아냐

1990년대가 끝나갈 즈음이었다. 전공의 생활이 고달프던 때 잠시나마 여유를 누리려 비디오 대여점에 들렀다가 주인이 권하는 영화 한 편을 빌려 보았다. 제목이 '가타카'여서 일본 영화인가 싶었다. 나중에야 'GATTACA'가 DNA를 이루는 네 가지 염기의 머리글자 A, T, G, C를 암시함을 알았다. 큰 기대 없이 본 영화였지만 한동안 나를 먹먹하게 했고,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영화는 유전자로 사람의 자격을 정하는 미래를 그린다. 우수한 유전자로 판정된 사람에게는 원하는 직업과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허락되는 삶은 가혹하다. 주인공 빈센트는 후자였다. 열악한 유전자를 가졌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살아 보기도 전에 삶의 한계부터 정해져 버린 셈이다. 그런데도 그는 가장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만 도전할 수 있는 우주비행사를 꿈꾼다. 결국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한 남자의 우수한 유전자 신분을 빌려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위험한 세계로 들어가고 만다.

그 무렵 의학계에서는 유전자 연구가 대세였다. 1990년 즈음 시작된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는 막대한 자원과 인재, 그리고 장밋빛 미래가 모여들었다. 인간의 설계도를 모두 읽을 수 있다면 질병의 비밀도 풀리지 않을까, 노화와 죽음의 경계마저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넘치던 때 이 영화는 조용한 질문 하나를 던진 셈이다. 설계도를 읽는 것만으로 한 사람을 다 알 수 있는가. 의사로서 내가 평생 붙들고 있는 질문도 어쩌면 이에 닿는다.

사실 이 영화가 나온 뒤인 2000년대 들어 자리 잡은 후성유전학은 환경과 습관, 노력에 따라 몸과 질병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알려줬다. 그래서 요즘 의사들에게 이 영화는 내게 주었던 감동과는 달리 너무 뻔한 얘기를 하는 무리한 설정의 B급 SF영화로 보일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의학은 유전자뿐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환자를 검사하고 분석한다. 우리는 이를 정밀의료라 부른다. 당신은 어떤 암에 걸릴 확률이 몇 퍼센트이고, 이 아이는 키가 얼마까지 자랄 것이고, 너는 무엇을 먹으면 안 되는 등 수많은 예측을 '고도로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결과'라는 이름으로 환자에게 전한다. 검사 결과와 위험도가 치료의 방향을 정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질병의 경과를 설명하는 언어가 어느 순간 그 사람의 남은 삶까지 규정하는 언어가 되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된다. '가능성이 낮은 편이지만'이라는 설명과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선언 사이에는 의사가 생각하는 것보다 깊은 간격이 있다.

영화에는 빈센트가 자신보다 신체적으로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동생과 바다 수영을 겨뤄 이기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은 "난 다시 돌아갈 힘을 남겨 두지 않았기에 이길 수 있었다"고 말한다. 부족함을 알면 더 간절해진다. 우리는 흔히 그것을 '결핍이 가져다주는 역설적인 힘'이라 부른다. 의사로서 만나는 수많은 환자의 질병은 모두 결핍의 산물이다. 타고난 유전자든, 오래된 나쁜 습관이든, 피할 수 없는 환경이든 결국은 결핍이다. 의지만으로 병을 이겨낼 수 있다는 말은 경계해야겠지만, 질병이라는 심각한 결핍 앞에서 절박해진 사람에게 위험과 확률을 계산하는 일만으로 충분히 좋은 의사가 되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영화의 마지막 모든 역경을 이기고 우주로 떠나기 직전, 주인공 앞에 한 의사가 있다. 그는 주인공의 유전자가 가짜임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검사 결과를 바꿔 주면서 기꺼이 그를 우주로 보낸다. 빈센트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긴 이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그는 검사 결과 너머에서, 주인공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어떤 시간을 살아 냈는지, 그가 무엇을 소망했는지도 함께 봤을 것이다.

정밀의료의 시대를 살아가는 의사로서 우리는 선배들보다 더 많은, 더 정확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 즐겁다. 거기에 더해 다른 한쪽도 바라볼 여유를 지닌 의사, 환자들이 무엇을 위해 내일을 기다리는지 살필 수 있는 의사가 넘쳐나는 세상을 조용히 기대해 본다.

김원석 성균관대 강북삼성병원 피부과 교수
김원석 성균관대 강북삼성병원 피부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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